올해 럭셔리 브랜드 루이비통과 스트릿 패션 브랜드 슈프림이 협업 상품을 내놓았다.

“루이비통은 슈프림의 적으로 남았어야 했다.” 지난 1월 루이비통과 슈프림의 콜라보레이션 컬렉션 이후 미국의 일간지 뉴욕타임스는 이런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번 컬렉션이 악세서리류를 제외하곤 지루하다”고 평했다. 그러나 뉴욕타임스가 뭐라든 아무 의미가 없었다. 둘의 만남을 두고 패션 마니아들은 ‘역대급 콜라보’라 불렀다.

스케이트 보드와 그래피티 같은 ‘길거리 문화’를 표방하는 ‘서브컬쳐’ 패션 브랜드 슈프림은 1994년 미국 뉴욕 뒷골목에서 탄생해 전세계 젊은이들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슈프림은 2000년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인 루이비통 로고를 무단 도용해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17년 뒤 루이비통은 그랬던 슈프림에게 손을 내밀었다. 올해 6월30일, 서울을 비롯한 런던·파리·도쿄·LA 등 전세계 주요 8개 매장에 ‘루이비통X슈프림’ 팝업스토어가 열렸다.

지난 2000년 슈프림은 루이비통 로고를 무단 도용한 스케이트 보드를 팔았다가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6월 30일 서울 청담동 루이비통 매장에서 열릴 판매 행사를 앞두고 매장 앞에는 밤을 새우며 입장을 기다리는 ‘캠퍼’들이 등장했고, 어김없이 중고 거래 사이트에는 여기서 산 물건들이 웃돈이 붙어 매물로 나왔다. 한 인터넷 카페에서는 매장에서 130만 원대였던 후드티가 발매 당일 250만 원에, 600만 원대이던 레더 자켓은 800만 원에 거래 완료된 것으로 알려졌다.

패션계 빅 이벤트에 중고물건 매매사이트 중고나라 역시 북적였다. 이 한정판 상품들은 웃돈이 붙어 거래되고 있다.

#팔찌가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늘어난 캠퍼
1차 판매 상품이 높은 가격에 되팔리자, 2차 캠핑 분위기는 한층 살벌해졌다. 1, 2차 발매 모두 캠핑을 했다는 박모(24)씨는 "1차 때는 전날부터 캠핑해도 원하는 물건을 샀는데, 이번에는 분위기가 과열돼 사흘 전인 화요일 밤부터 캠핑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2차 발매를 앞둔 매장 앞 캠핑 현장에선 여러 갈등이 불거졌다. 먼저 루이비통 측에서 캠퍼들이 자발적으로 정해놓은 명단을 인정하지 않겠다며 해산을 요구했다. "날씨와 안전, 그리고 통행불편으로 인한 청담동 주민들의 거센 민원이 발생했다"는 이유였다. 일부에서는 "루이비통 측이 캠핑 해산을 하지 않으면 발매를 취소하겠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며 캠퍼들의 불안감을 부채질했다. 이런 루이비통의 요구에 캠퍼들은 응하지 않았다. 매장 입구에서 벌어지는 캠핑장 갈등은 실시간으로 브랜드 마니아들이 모인 네이버 카페 '나이키 매니아'에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어차피 루이비통에선 캠퍼들 명단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이대로 가만히 있기엔 불안하다”며 카페 내에 함께 새로운 줄을 만들어 기다릴 사람을 모집한다는 게시글도 올라왔다. 이들은 실제로 청담동 루이비통 매장에 모였다고 알려졌다. 카페 내에선 ‘유혈사태’가 벌어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왔지만, 7월 5일 루이비통 측의 추첨권 배부 발표로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문제는 여기서 또 한 번 발생했다. 6일 오후 2시에 추첨권을 나눠주겠다고 했던 루이비통 측이 6일 새벽 2시부터 기습적으로 추첨권을 배부하기 시작한 것이다. 6일 새벽 청담동 매장 앞에는 캠퍼 1000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중 900명이 입장 추첨권을 얻었다. 루이비통의 갑작스런 조치에 지방에 거주하는 소비자들은 격분했다. 애초 캠퍼 명단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과 달리 명단 작성자를 구분해 먼저 기회를 줘 결국 캠핑이 이득이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루이비통 측은 900번 까지 추첨권을 배부해, 7·8·9일에 걸쳐 300명 씩 입장시킬 계획이었다. 7일차에 입장하는 사람들은 노란색, 8일차는 주황색, 9일차는 초록색 팔찌를 착용했다.

7월 7일 2차 발매일에 루이비통이 나눠준 팔찌를 찬 구매 희망자들 모습.

인터넷 카페에는 소비자와 루이비통 양측을 향한 비난이 모두 쏟아졌다. “지금 캠핑하는 사람들 다 리셀(되팔기)이 목적인 것 아니냐”며 리셀러(이익을 위해 물건을 되파는 사람)를 향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리셀러 때문에 실착러(실제 착용하려고 구매하는 사람)만 손해 본다”는 얘기가 나왔다. “슈프림은 적은 물량을 발매해 손님들이 일부러 밤새 기다리게 만드는 ‘캠핑 유도’ 브랜드인데, 루이비통이 이런 문화를 처음 접해 체계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물건 발매 직전까지 밤을 새서라도 기다리는 슈프림 마니아들의 소비 문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청담동 앞 캠퍼들을 ‘블랙컨슈머’ 취급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장의 형성…중국인 매입자 vs 일본인 판매자
지난 7일 매장 입구에는 외국인들이 또 다른 진을 치고 있었다. 170번 팔찌를 두른 김모(21)씨는 "지금 여기 있는 외국인들 80%가 중국인일 거에요. 매입하려고 서있는 거죠"라고 답했다. 이번 컬렉션 제품은 중국에서 발매가 되지 않아 중국인 마니아들 사이에서도 관심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 씨는 “지금 저 일본인은 물건을 팔고 있는 거에요. 아마 1차 발매 때 구입했겠죠”라고 덧붙였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구매자에게 파란 셔츠를 입은 한 중국인 남성이 서툰 영어로 가격과 품목을 묻는 장면이 보였다. 한 손에 쥐기 버거워 보이는 돈 다발이 오고갔다. 일본인 남성은 양손 가득 쥐고 있던 루이비통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은 채 신발 사이즈와 가격을 거듭 언급하며 흥정을 시작했다.

7일 2차 발매일에는 서울 청담동 루이비통 매장 앞에서 슈프림 협업 상품을 사들이기 위해 5만원짜리 돈다발을 한움큼 쥐고 나타난 사람들도 눈에 띄었다.

#'역대급 콜라보'의 그림자
슈프림은 젊은층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브랜드다. 젊디젊은 '스트리트 패션'의 선두주자는 낡은 브랜드 이미지가 좀처럼 '혁신'되지 않고 있는 루이비통에게는 '유혹적인 수혈' 대상이었다. 더욱이 과거 '디자인 도용'을 했던 브랜드까지 끌어안는 '유연함'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슈프림’과의 ‘짧은 동거’가 루이비통의 ‘회춘’에 도움을 줬을 가능성보다는, 슈프림의 가치만을 더 높여줄 가능성이 크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분석이 나온다. “이번 제품을 산 90%가 슈프림 팬이었을 것”이라는 한 전문가 얘기를 보면, 이들이 앞으로 ‘슈프림 없는 루이비통’을 새롭게 찾을 것 같지는 않다. 루이비통이 무라카미 다카시의 만화적 이미지를 차용했을 때엔 “루이비통의 참신한 도발”이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이번엔 오히려 슈프림 마니아들로부터 “루이비통이 옷을 사려고 밤을 새우는 ‘캠핑’ 문화에 얼마나 익숙하지 않은 지 알게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루이비통과 슈프림의 콜라보레이션은, “요즘엔 이런 게 유행”이라며 양복바지에 스냅백을 쓴 어색한 중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우아하게 나이먹는 브랜드로 남기보단 슈프림과 손 잡는 파격을 택한 루이비통. 하지만 ‘청담동 캠핑 대란’을 거치면서 안타까움과 아쉬움도 함께 남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