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여름, 책 집필을 위한 자료 수집 차 유럽으로 떠났다. 아내는 "고등학교 3학년 큰애는 내가 맡겠지만 중학교 1학년 둘째는 자신이 없으니 데리고 떠나라"고 말했다. 돈이 얼마가 더 들더라도 그건 나중에 생각하라는 거였다. 가만히 있어도 짜증을 부리는 애를 데리고 먼 길을 떠날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파왔다. 첫 번째 행선지는 영국 런던이었다.
런던은 내가 오랫동안 유학했던 곳이어서 자료도 쉽게 구할 수 있었고, 특히 판타지소설 '해리 포터'를 좋아하는 딸에게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런 딸아이를 생각해 첫 방문지로 킹스크로스(King′s Cross)역을 택했다. '해리 포터' 팬에게 성지 중의 성지이기 때문이다. 해리 포터가 '호그와트 마법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플랫폼 9¾'을 찾아 헤매던 곳. 그리곤 플랫폼의 '벽'을 향해 힘차게 트롤리를 밀고 들어간 곳. 역 바깥쪽 벽에 '플랫폼 9¾'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관람객을 위해 별도 장소를 마련해 놓은 것이다. 바로 옆에 기념품 가게까지 생겼다. 딸은 벌써부터 황홀해하는 모습이었다.
런던의 하고많은 기차역 중 하필 이곳이 소설의 무대가 된 것은 아마도 저자 조앤 롤링이 이 소설을 쓸 때 살았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Edinburgh)를 오고 가는 기차가 제일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킹스크로스역에서 4~5시간 기차로 달리면 에든버러인데, 조앤 롤링이 자주 들러 글을 썼다는 카페 '엘리펀트 하우스(The Elephant House)'에서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할 수도 있다.
기념사진을 몇 장 찍고 오랜만에 그늘이 가신 환한 표정의 딸을 데리고 바로 옆 세인트 판크라스(St. Pancras)역으로 향했다. 며칠 뒤 프랑스 파리행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서였다. 세인트 판크라스역은 런던과 파리를 잇는 유로스타가 운행되는 역이다.
역 앞에 선 딸아이는 크게 놀라는 모습이었다. "아빠, 여기 호그와트 마법학교 같아!" 뾰족뾰족한 첨탑이 들어선 웅장한 규모의 중세 건물이 해리 포터가 다니던 마법학교와 비슷해 보였던 것이다. "정말 그렇네." 맞장구를 쳤다. 그리곤 "붉은 벽돌에 뾰족한 첨탑이 줄지어 서 있고 높낮이 변화가 큰 건물을 일컬어 '고딕'양식이라 한다"고 설명해줬다. 물론 눈치를 조금씩 살피면서.
원래 이런 건물은 중세에 유행했는데, 영국은 유럽의 어느 곳보다도 이런 고딕 건축의 전통이 오래 지속됐고 영국 곳곳에서 쉽게 만날 수 있으니 해리 포터의 실제 무대가 된 것이다. 해리 포터 영화의 주 무대로 등장했던 북동부의 앤윅 성(Alnwick Castle)이 대표적이다. 기숙학교부터 고딕 성당까지 중세의 전통이 생생히 살아 있어 마법사라는 소재가 현실성을 입게 됐다. 호그와트의 식당으로 쓰였던 옥스퍼드대학교 크라이스트 처치 칼리지(Christ Church College) 식당 사진을 찾아 딸에게 보여줬다. 딸은 이제 자신이 정말 해리 포터의 나라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영국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해리 포터'가 대단히 영국적인 콘텐츠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런던 시내만 거닐어도 해리 포터 이야기 중 등장인물이 어딘가 나타날 것 같은 고색창연한 거리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영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중세의 무대로 느껴지는 것은 고딕 건축 양식이 19세기에 들어 대대적으로 다시 유행했기 때문이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 영국 미술계에는 아주 흥미로운 움직임이 벌어졌다. 그리스·로마에 기원을 둔 고전 양식을 비기독교적이라고 비판하면서 중세 종교 건축의 미학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산업혁명을 이끌면서 세계를 호령하던 대영제국은 자신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커졌고 따라서 자신의 고유한 색채를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오래전에 사라졌던 고딕 건물을 흉내 낸 건물이 다시 들어섰다. 대표적인 예가 1840년부터 지어진 영국 국회의사당과 1868년에 문 연 세인트 판크라스 역사다.
런던에서의 일정은 빠듯했다. 킹스크로스역 인근 대영도서관과 대영박물관 답사가 이어졌고, 시차 때문에 녹초가 돼 오후 4시쯤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쓰러져 폭풍 수면에 들어갔다. 둘 다 오후 8시가 돼서야 깼는데 칭얼거리는 딸아이를 채근해 밖으로 나갔다. 유학생 시절부터 즐겨 다니던 '노스 시 피시(North Sea Fish)'라는 피시 앤드 칩스 전문식당을 향해서. 그리고 피시 앤드 칩스 1인분을 포장해 딸아이와 공원 벤치에 앉아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물론 식초와 소금을 넉넉히 쳐놨다.
서머타임으로 아직 해의 기운이 땅에 걸려 있었다. 런던의 호젓한 공원에서 딸아이와 생선 튀김의 두툼한 식감을 즐겼다. 딸아이는 이때 먹은 피시 앤드 칩스가 '인생 음식'이었다고 지금껏 말한다. 어느 청소년 상담사에게 들은 바로는, 아이들은 아빠와의 좋은 추억을 떠올릴 때 '여행' 혹은 '아빠가 해준 음식'을 맨 앞에 둔다고 한다. 그날 나는 이 숙제를 한꺼번에 다 했다. 물론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딸아이는 인터넷이 느리다고 투덜거렸다.
해리포터 20주년 여행 올해는 ‘해리 포터’ 출간 20년 되는 해. 팬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은 역시 런던에 있는 ‘해리포터 스튜디오’다. 영화 속 장면을 눈앞에 펼쳐보여주는 곳이다.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성인 39파운드(약 5만7000원). wbstu diotour.co.uk 런던에는 도보나 버스, 보트를 타고 해리 포터 영화의 촬영 장소를 둘러보는 가이드 투어가 마련돼 있다. 마법사나 마녀 옷을 입어 보는 체험은 옵션. visitlondon.com
킹스크로스역 예전에는 슬럼가였으나 지금은 유명 관광지가 돼 치안이 안전해졌다. 플랫폼 9¾ 바로 옆에는 ‘해리포터 숍’이 생겨 기념품을 쉽게 구할 수 있다. 크라이스트처치 칼리지 칼리지 식당과 성당 등은 일반 관광객에게 공개되지만 시즌별로 접근이 제한된다. 접근 범위에 따라 1만원 안팎의 입장료가 시즌별로 달라져 사전에 확인할 필요가 있다. 관광 시즌 중 칼리지 식당에는 식사가 제공되지 않는다. www.chch.ox.ac.uk 엘리펀트 하우스 J K 롤링이 ‘해리 포터’를 집필한 곳으로 유명하며 특히 창밖으로 아름다운 에든버러 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밖에도 에든버러에 있는 카페 ‘Spoon’도 조앤 롤링이 자주 찾은 곳으로 유명하다.
노스 시 피시 식당과 포장전문 매장이 나란히 있다. 대구·연어·가자미 등 다양한 생선 튀김 메뉴가 있다. 메인 메뉴는 11~23파운드. 어린이용은 6.95 파운드. 월~토요일 정오~오후 2시 30분, 오후 5시~10시. 일요일 오후 5시30분~9시30분. northseafishrestaurant.co.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