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년 중국의 사찬태(謝纘泰)가 그린 시국도.

1898년 중국 선각자 사찬태(謝纘泰)가 홍콩에서 '시국도(時局圖)' 한 장을 발표한다. 서구 열강과 일본의 각축장이 된 중국 형세를 그림으로 표현해 국민을 경각시킬 목적에서였다.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일본이란 맹수들이 중국을 노리는 형국을 그렸는데, 그림 좌우에 '불언이유일목요연(不言而喩一目了然)'이란 부제가 달렸다. '말하지 않고도 한눈에 깨우쳐 준다'는 뜻이다. 곰인 러시아, 독수리인 미국, 호랑이인 영국, 태양으로 그려진 일본이 중국을 잡아먹으려는 그림이다.

이 발상은 국역(國域) 풍수 차원의 형국론과 유사하다. 한 나라와 그 주변국의 위치와 형세를 짐승이나 사물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방식이다. 호랑이→개, 뱀→개구리와 같은 2자 간의 관계, 매→닭→지네 같은 3자 간 관계, 코끼리→호랑이→개→고양이→쥐 같은 5자 간 관계로 표현되기도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짐승들을 보면 쉽게 그 나라가 처한 상황을 객관화할 수 있다. 이러한 우리 풍수의 형국론은 지정학적 관점에서 조선(한반도)의 입지를 논하고 그를 바탕으로 한반도가 미래에 어떠한 국가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도였다.

18세기 중엽 이중환은 조선을 '노인이 중국에 절하는 형상이기에 중국을 넘볼 생각을 못한다'고 했고, 20세기 초 강증산은 조선이라는 바둑판을 다섯 신선(주변 열강)이 둘러싸고 있는 형국으로 파악했다. 1908년 최남선은 우리나라를 대륙을 향해 달려드는 사나운 호랑이로 보았고, 최영준(고려대·지리교육) 교수는 '중국을 향해 모로 누운 큰 짐승'(1990, '영남대로')으로 보았다.

이러한 형국론은 그 시대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려는 대응 논리 혹은 그 시대를 정당화하려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강하다. 이 때문에 일찍이 1908년 황성신문은 '형산(荊山)의 다듬지 않은 옥돌도 잡석으로 평해버리면 보물이 되지 못할 것이며 오동나무도 땔감으로 써버리면 가야금으로 만들 수 없듯 동양 세계에서 아름답고 청수한 우리 대한의 금수강산이 진면목을 발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형국론들을 경계하는 사설을 싣기도 했다. 최근에는 산악인이자 의사인 조석필 선생이 한반도 형국을 논함에 일제의 조선 지형 왜곡을 그대로 수용하는 어리석음을 비판하기도 했다(1997, '태백산맥은 없다').

19세기 말 유럽에서 태동한 지정학 역시 '지리적 입지가 그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에 풍수의 형국론과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런데 우연히도 금년 5월과 2월 한·일 양국에서 지정학을 제목으로 한반도를 다룬 책들이 출간됐다. '지정학으로 읽고 해석하다―몰락의 나라 중국과 한국, 번영의 나라 일본'(일어판)과 '통일의 신지정학'이다. 앞의 책은 대만 출신 고분유(黃文雄)가 쓴 책으로 제목 자체로 그 내용을 충분히 예측하게 한다. 일본 우월주의 식민사관을 계승한 것이라 논할 가치도 없지만, 한반도 역사와 지리를 악의적으로 곡해하여 한국의 몰락을 예언한 책이다. '통일의 신지정학'은 국내 교수들의 통일정책의 실효성에 영감을 주는 글들을 의도했다고 한 데다가 풍수 관련 글도 있어 기대감을 갖고 읽었다. 국제사회에서 강력한 변수로 떠오른 북한을 서구의 지정학이나 풍수의 형국론으로 어떻게 파악했는지 알고 싶었다. 아쉽게도 새로운 것은 없었다. 앞에서 소개한 '시국도'처럼 일목요연하지도 않았고 일부는 아주 오래된 글이었다. 핵과 ICBM을 가졌다는 북한은 대화를 요구하는 우리 정부는 안중에도 없다. 이 경우 형국론에는 세 마리나 다섯 마리 짐승이 아닌 두 마리의 짐승이 등장한다. 미국에는 당랑거철(螳螂拒轍)로 보일지 모르나 북한은 지금 자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북·미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형국으로 보고 인민들을 선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