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기훈(34·수원 삼성)이 기억하는 월드컵은 상처로 가득 차 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멤버 23인에 뽑혀 경기에 나섰지만 '결정적 실책' 한 방으로 국민 역적이 된 경험 때문이다. 조별 리그 2차전 아르헨티나를 맞은 경기 후반 12분이었다. 1―2로 뒤진 채 잡은 골키퍼와 일대일 찬스, 염기훈이 왼발로 밀어 때린 공은 골대 옆으로 빗나갔다. 왼발 킥이 뛰어나 붙은 '왼발의 마법사'란 별명은 이때부터 '왼발의 맙소사'로 바뀌어 그를 따라다녔다. 입에 담기 어려운 인신공격도 수년 동안 받았다.

이란·우즈베키스탄전을 앞두고 대표팀에 26개월 만에 발탁된 염기훈이 지난 4월 25일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 홈경기 가와사키(일본)전에서 드리블하는 모습.

오명을 씻을 기회가 7년 만에 찾아왔다. 2018 러시아월드컵으로 가기 위해 이란(31일 오후9시 서울월드컵경기장) 우즈베키스탄(9월 5일 밤 12시 타슈켄트)을 상대로 마지막 일전을 치러야 하는 축구 대표팀 신태용 감독이 34세 노장 염기훈을 26개월 만에 불러들인 것이다.

염기훈은 2006년 K리그 전북 현대에서 데뷔했다. 뛰어난 왼발 킥과 왕성한 활동량, 성실함이 장점이다. 그는 데뷔 첫해 신인상을 받으며 이름을 알렸고, 이후 울산 현대를 거쳐 2010시즌 수원 삼성으로 이적하며 기대를 받았다.

하지만 남아공월드컵을 치르고 난 뒤 염기훈은 만신창이가 됐다. 마법사 대신 맙소사, 염깁스(발에 깁스하고 축구한다), 염기복(기복이 심하다)이란 별명이 낙인처럼 붙었다. 함께 부진했던 오범석(강원)과 묶여 '오염 라인'으로도 불렸다. 그가 묵묵히 성장해 2015년 K리그 50골-50도움 클럽 가입, K리그 역대 최다 도움(69개) 기록을 세우는 등 정상급 활약을 했을 때도 "앞으로 리그에서만 뛰고 국가대표엔 오지 마라"는 조롱이 달렸다.

지난해엔 최정상을 달려왔던 프로 인생도 위기를 맞았다. 2014·2015시즌 리그 2위였던 소속팀 수원이 추락을 거듭하며 강등권 근처인 10위까지 순위가 떨어진 것이다. 당시 주장 염기훈은 항의하는 팬들 앞에 나가 눈물을 흘리며 "강등만은 막겠다"고 사과했다. 시련의 연속이었다.

다행히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작년 도움왕(15개)에 오르며 약속대로 팀의 강등을 막았다. FA컵에선 팀이 우승을 차지하며 MVP로 뽑혔다. 올 시즌 그는 수원 구단 최초로 4년 연속 주장을 맡아 다시 한 번 동료들을 이끌고 있다. 도움 공동 2위(7개)에 오르는 꾸준한 활약으로 팀을 리그 3위에 올려놓았다.

신태용 감독이 중요한 시기에 염기훈을 불러들인 이유를 그의 축구 인생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여전히 뛰어난 어시스트 능력이다. 신 감독은 "나이는 있지만 염기훈은 K리그 최고 기량을 갖고 있다. 단순히 노장이라 뽑은 게 아니다"고 했다. 시련을 수차례 극복한 정신력이 현 대표팀에 필요했다는 분석도 있다. 신 감독은 "염기훈은 정신적으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선수다. 배고플 때 축구를 해 봤다. 이런 선수가 앞에서 열심히 하면 후배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염기훈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내가 예전에 박지성·이영표 형들에게 배웠던 것, 헌신과 솔선수범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겠다"며 "경기력에서도 어린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한 가지 목표를 덧붙였다. "7년 전 오명을 벗고 반드시 명예를 회복하겠습니다. 이번 2연전에서 '왼발의 맙소사'가 아닌 '대한민국 왼발의 마법사'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