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 서희(徐姬·31)는 '서씨 집안의 여왕'으로 통한다. 4대 독녀의 탄생을 기뻐하며 할아버지는 손녀 이름을 왕비라는 뜻의 희(姬)라고 지었다. '집안의 여왕'은 우연한 계기로 발레를 시작해 수십 년 후 세계 정상급 발레단으로 손꼽히는 아메리칸발레시어터(ABT) 수석무용수로 우뚝 섰다. 발레단 동료들 사이의 별명은 '퀸 흴리자베스 더 퍼스트(엘리자베스 여왕을 빗댄 표현)'. ABT의 아시아인 최초 수석 무용수, 2012년 뉴욕타임스 선정 '올해의 무용수'…. 승승장구 중인 그녀는 재작년 한국에 '서희재단'을 설립해 발레 영재들의 해외 진출을 돕고 있다.
최근 한국에 잠시 들른 그녀를 서울 삼성동 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여름 동안 서희재단을 통해 국내를 누비며 아이들에게 발레를 가르치기 위해 온 참이었다. '유명 발레단의 수석무용수 되기' '서른살 전에 누군가를 돕기'란 꿈을 일찌감치 이룬 이 '발레 여왕'은 "더 잘하고 싶다"라는 말을 인터뷰 내내 반복했다.
―ABT의 첫 한국인 수석무용수다. 기쁨만큼이나 부담도 많겠다.
"2010년 솔리스트가 되기 전까진 '주역이 되고 싶다'는 생각만 했는데, 막상 되고 나니 그 이후에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 이후를 생각해본 적이 없던 것이다. 처음 2년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ABT는 스타들 많기로 유명한 발레단이다. 운, 실력, 타이밍. 운 좋게도 이 셋이 맞아떨어진 것 같다."
―이제는 그 자리가 익숙해지지 않았나.
"발레단에서 제일 높은 포지션에 있다. 남들이 보면 나는 언제나 비슷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작은 디테일까지 완벽히 해내려고 매번 가슴 졸인다. 무엇보다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을 만족시키고 싶다. 나를 10년 가르친 선생님과 몇 날 매달렸던 스텝에 성공해 둘이서 손 맞잡고 기뻐하는 장면을 종종 꿈꾼다."
―12세라는 다소 늦은 나이에 발레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방과 후 수업으로 배드민턴부를 지망했는데 반이 꽉 차서 발레반에 들어갔다. 이후 선화예술중·고에서 주최하는 콩쿠르에서 장려상을 받은 뒤 본격적으로 발레를 시작했다. 그런데 하면 할수록 발레에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다. 발레라는 건 오랜 역사를 갖춘 예술이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함부로 임해선 안 된다는 걸 깨닫게 됐다. 매진할 수밖에 없었다."
―재단을 만들었다. 세계 9~19세 발레 유망주들이 실력을 겨루는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YAGP) 한국 예선을 유치해 한국의 유망주를 외국으로 데려간다던데.
"YAGP는 다른 배경에서 자란 학생들이 와 꿈을 실현하며 무용수로 자라는 과정을 거치는 곳이다. 나도 그 과정을 거쳤다. 서른 전에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이왕이면 내가 제일 잘하는 것으로 가장 먼저 내 나라를 위해 하고 싶었다."
―한국 생각을 많이 하나 보다.
"얼마 전 남동생이 보낸 편지를 다시 꺼내 읽었다. '누나랑 매일 싸웠는데 이젠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어'라는 문장이 가슴에 와닿더라. 한국 떠난 지 17년이 넘었다. 이제 한국보다 미국에서 더 오래 살았다. 전에는 이해가 안 갔는데,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무엇인지를 알겠다. 자연스레 '내 나라'에 대한 마음이 커졌다."
―은퇴 후 사회 공헌을 하는 게 일반적이다.
"난 현역 무용수고, 무용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다만 현역일 때 내가 아는 인맥과 발레계 상황을 알려주고 싶었다. 재단 사업이 겉은 멋있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일은 막노동 수준이다. 내 것을 나눠주니 마음은 행복한데 일은 고되다. 현역에서 뛰면서 이 일을 한다고 하니 주변에서 딱하게 여기더라. 그런지 도와주는 사람이 많다. 누군가가 '성공하는 삶이란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더라. 그 말대로라면 성공한 것 같다."
―YAGP에서 통과한 아이들을 '서희 키즈'라 부르더라.
"내가 세운 공(功)은 아니다. 내 역할은 아이들이 더 큰 무대로 갈 수 있는 다리를 놓아주는 것일 뿐이다. 해외 콩쿠르에서 선발될 수 있게 도와주고, 합격하면 어느 발레단에 가 무엇을 해야 할지 조언해준다. 사실 이런 부분만 생각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아이들 방을 구하는 방법, 숙식까지 챙기게 됐다(웃음). 에너지가 소진될 때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아이들의 미래가 매끄럽게 굴러가게 하는 것이 내 역할인걸!"
―후배들에게 중요하게 가르치는 부분이 있다면.
"선생님이 아니기 때문에 아이들을 프로 무용수의 눈으로 바라본다. '어떻게 가르쳐야 콩쿠르에서 1등 할까'가 아니라 '무용수가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를 알려준다. 왜 발레를 하고 싶은지, 어떤 춤을 어떻게 추고 싶은지를 끊임없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룸(room·여지)'을 만들어준다.
―'생각하는 룸'이라니.
"무용수는 새로운 걸 창조해내야 하는 크리에이터(creator)다. '룸'은 상상을 펼치는 공간이다. 상상력의 공간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단순히 발레만 하는 사람인지, 크리에이터인지 나뉜다. 한국과 미국 발레 교육의 결정적 차이가 이 부분이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한국에선 열다섯 살이라면 열다섯 살짜리 몸으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가르친다. 반복되는 연습에 '상상'이란 중간 과정이 없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에선 발레 말고 재즈, 현대무용 등을 두루 경험하게 하고 마지막에 스스로 발전할 수 있도록 여지를 남겨놓는다. 홀로 일어서는 힘이다."
―당신은 어떤 환경에서 자랐나.
"집에서 나는 발레리나가 아니다. 부모님은 나를 평범한 사람으로 대해주셨다. 유학할 때 한번은 살이 찐 적이 있는데 어머니가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그 나이에 살찌는 것은 당연하다. 잘 먹고 행복하게 지내는 것이 중요하지, 안 먹어 몸을 해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셨다. 부모님은 내가 발레 아닌 다른 것에도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늘 울타리 밖에 서 계셨다."
―발레 말고 관심 분야가 있다면.
"일터에서 발레를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주로 밖에서 어울리는 친구들은 다른 예술 종사자들이다. 다른 일을 하고, 다른 것을 보고 듣는 경험이 발레를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전문가처럼 깊이 아는 건 아니지만 그림을 보고 음악을 많이 듣는다. 유명한 그림과 화가 이름을 달달 외우기보다는 "어느 작은 갤러리에서 어떤 그림을 봤는데 어떤 식이었고 어떤 느낌이었다"고 친구들과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예술이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나만의 예술 공부법이다."
―발레리나로서 오를 수 있는 정점에 어린 나이에 도달했다. 남은 목표가 있는가.
"아직도 이따금 공연 전 무서운 생각이 파고든다. 주변에선 매일 똑같은 걸 하는데 뭐가 떨리느냐고 말하지만(웃음). 여전히 더 잘하고 싶어 그럴 거다. 이 떨림은 심적으로는 달갑지 않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내 안에 잘하고 싶다는 열정이 있다는 의미 아니겠는가. 오늘도 잘하는 것, 그게 내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