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수도 워싱턴을 '못생긴 사람들의 할리우드'라고 한다. 워싱턴 거물급 인사들은 유명하기로 치면 할리우드 스타 못지않은데 외모는 연예인에 못 미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방송이나 신문에서 너무 자주 봐 익숙한 사람들과 일상에서 자주 부딪힌다. 공연을 보러 갔다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근처에 있어서 놀란 일도 있고, 수퍼마켓에 갔다가 계산대 앞에 서 있는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국제통화기금) 총재를 본 일도 있다.
워싱턴은 권력과 사람에 얽힌 이야기로 해가 뜨고 진다. 권력의 중심이 어디로 움직이느냐가 늘 최대 화제이다.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나 재미있어한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서는, 그를 좋아하든 그렇지 않든 거의 중독 수준으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니 사실상 트럼프 대통령이 소유한 '트럼프 인터내셔널 호텔'이 워싱턴에서 새로운 '권력의 중심'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놀랄 일도 아니다.
트럼프는 '웰던'을 좋아해
트럼프 대통령이 트럼프 호텔의 식당 'BLT 프라임'에 자주 가서 늘 같은 자리에 앉아 '웰던(well-done: 완전히 익힌) 스테이크'를 토마토케첩에 흠뻑 적셔 먹는다는 소문이 한동안 돌았다. 그러자 그 식당의 셰프 데이비드 버크가 최근 한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웰던 스테이크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케첩에 찍어 먹진 않는다"고 확인해줬다. 실제 가장 자주 먹는 음식은 가자미이고, 햄버거와 스테이크, 새우 칵테일도 좋아한다는 점도 알려줬다.
대통령이 이 호텔에 자주 가니 권력 지향적 인사들이 모여들고 관광객들이 가세해 호텔은 날로 번창하는 모양이다. 행정부 주요 인사를 포함해 트럼프의 최측근들이 호텔에 상주하며 회의하고 식사를 한 덕에 올 1분기 실적은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고 한다. 그래서 트럼프 호텔은 '백악관 별관'이라고도 불린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한 후 호텔은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와 에릭 두 아들이 경영하고 있다. 하지만 백악관에서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인 데다 대통령이 자주 이용하니 아예 백악관 부속기관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근엔 말레이시아 총리가 이 호텔에 있다가 백악관으로 가서 트럼프를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백악관 대기실'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말레이시아 총리 일행이 트럼프 호텔에 묵느냐는 질문에 백악관 사라 허커비 샌더스 대변인은 "우리가 그쪽 호텔 예약까지 해주지는 않는다"고 받아쳤다.
백악관 별관 '트럼프 호텔'
트럼프 호텔은 백악관에서 펜실베이니아 가(街)를 따라 의사당 쪽으로 가는 길에 있다. 1899년에 지어진 건물인데 원래 우체국이었다가 나중엔 사무실로도 쓰였다고 한다. 트럼프는 몇 년 전 이 건물을 정부에서 장기임대하는 형식으로 빌려 호텔로 탈바꿈시켰다. 이제는 대대적인 개·보수를 통해 화려한 외양으로 재탄생했지만 쇠락한 느낌이 드는 낡은 빌딩이었을 때도 매력적이었다.
지난봄 취재원과 만날 장소를 찾다가 '시대 흐름에 맞게' 트럼프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취재원이 총지배인 미켈 뎀린코트와 잘 아는 사이인 덕에 인사를 나누게 됐다. 뎀린코트는 트럼프 대통령은 물론 그 자녀와 오랫동안 같이 일해온 사람이다. 지금도 트럼프 호텔의 실질적 소유주인 트럼프 대통령의 큰아들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와 둘째 아들 에릭과 함께 일한다. 그는 워싱턴에서 트럼프 가족을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꼽힌다. 인터뷰를 하자고 했더니 트럼프 대통령이나 정치적인 문제를 묻지 않는다면 가능하다고 했다.
며칠 후 우리는 크림색 벽에 진한 푸른색 장식이 있는 회의실에서 마주 앉았다. 그는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완벽하게 깔끔한 차림이었다. 그는 트럼프 가족과 자신의 인연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트럼프 대통령의 아들들과 10년을 일했다. 딸 이방카와도 함께 일했다. 이제는 백악관 선임고문으로 들어갔지만···. 트럼프 가(家)의 호텔 사업은 '패밀리 비즈니스'라 규모가 작다. 트럼프 아들들은 우리가 가장 잘하는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해준다. 늘 우리를 밀어준다. 고객들에게 울림을 주는 우리만의 특별한 서비스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트럼프 회사에 15~25년씩 근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가족처럼 존중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트럼프 아들들 어려서부터 사업 배워
뎀린코트 총지배인은 도널드 트럼프 주니어가 28세 때, 둘째 아들 에릭이 22세 때 그들을 처음 만났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들은 평범한 20대와는 달랐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사업을 옆에서 보고 배웠기 때문에 그때 이미 경영능력 면에서 상당한 수준에 올라 있었다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아들들은 사업계획을 만들어 호텔을 지은 후 총지배인에게 열쇠를 내준다고 한다. 호텔 경영을 맡기는 것이다. 시카고와 캐나다 토론토의 트럼프 호텔 개관도 그의 손을 거쳤다. 요즘 트럼프의 두 아들은 정기적으로 호텔에 나와보고 총지배인과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통화한다고 한다. 그는 "투자를 비롯한 모든 결정에서 나를 믿어준다"고 했다.
지난해 가을 본의(?) 아니게 트럼프 호텔 개관식에 갔다. 한창 대선 유세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당시 공화당 대선후보였던 트럼프가 이 호텔에서 선거 행사를 한다기에 갔더니 연설 끝나고 호텔 로비에 세워진 무대에 트럼프의 아들딸들이 나와 호텔 개관식을 했다. 가족 행사에 기자들이 초대된 격이었다. 그때만 해도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기에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되든 아니든 워싱턴에 눌러살 작정인 모양이라고 다들 수군거렸다.
트럼프 호텔은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하면서 취임식 때 인기 절정이었다. '트럼프'란 브랜드에, 취임식 관련 행사장과 가까운 입지 덕에 광고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뎀린코트 총지배인은 "호텔은 최고의 입지가 최고의 경쟁력"이라고 했다. "모든 트럼프 호텔이 그렇듯이 건물 자체가 독특한 경험을 선사한다. 하나도 같은 건물이 없다. 그다음은 입지다. 만일 이 호텔이 여기서 다섯 블록 더 떨어진 곳에 있었다면 지금 같은 성과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 '바로 여기 있다'는 점이 제일 중요하다. 사람들이 워싱턴에 오는 이유가 무엇이든, 박물관에 가는 것이든, 로펌이 몰려 있는 K 스트리트를 찾는 것이든 다 가까이에 있으니까 성공할 수 있었다."
'메이드 인 USA' 없는 트럼프 호텔
외국 기자 눈으로 보면 백악관 근처에 있는 대통령 소유의 호텔이 낯설고 불편해 보인다. 부동산 재벌 출신 대선후보란 독특한 이력 때문에 취재 현장에서 특이한 일이 자주 벌어진다. 대선 승리 직후 뉴욕의 트럼프 타워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기자회견 장소는 뉴욕 5번가에 있는 트럼프 타워 로비였다. 비좁은 공간에 수백명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우리로 치면 대통령 당선인이 사는 주상복합 아파트 1층 로비에서 기자회견을 한 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경영은 아들들에게 넘긴 상태라지만 트럼프 호텔이 트럼프라는 이름 덕에 번창하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일부 시민단체들이 소송을 제기하기도 한다.
개관 직후엔 워싱턴포스트 기자가 하룻밤 856달러 숙박비를 내고 이 호텔에 묵은 소감을 기사로 쓰기도 했다. 이 기자는 코란을 갖다 달라고 주문했다. 무슬림 입국을 금지하겠다고 해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대선후보 소유의 호텔에 가서 테스트해본 셈이다. 호텔 직원은 즉시 코란과 기도할 때 쓰는 매트까지 들고 달려왔다. 말로는 '미국 우선'을 외치지만 호텔 방에 미국산이 없었다는 점도 꼬집었다. 초콜릿 정도를 제외하면, 이탈리아 침대보와 한국 텔레비전에 이르기까지 트럼프가 싫어하는 외국 물품만 가득하더라는 것이다.
트럼프 호텔 앞은 온갖 시위의 메카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여성차별 발언 때문에 주변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반트럼프 시위 때는 당연히 시끄러웠다. 최근엔 호텔 내 식당 직원이 인종차별을 받았다는 논란도 있었다.
트럼프와 트럼프 호텔은 앞으로도 계속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낼 것이다. 그는 자신의 책 '거래의 기술'에 이렇게 썼다. "좋은 평판은 나쁜 평판보다 낫다. 나쁜 평판은 때때로 평판이 전혀 없는 것보다 낫다. 간략히 말해서 논란은 장사가 된다는 것이다.' 트럼프 호텔 역시 트럼프 스타일로 번창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