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오전 미국 시애틀의 중심가. 미국 최대 전자상거래 업체인 아마존 본사가 있는 건물 주변은 온통 공사판이었다. 10여곳 이상에서 빌딩이 새로 올라가고 있거나, 터파기 공사를 하고 있었다. 모두 아마존 신사옥들이다. 현재 아마존 건물로는 새로 입사하는 직원들을 감당할 수 없어 본사 인근 부지를 대거 매입해 새 사옥을 대거 짓는 중이다.
이뿐 아니다. 시애틀 외곽 지역으로 나가니 새로 입사한 아마존 직원들이 살 아파트 공사 현상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시애틀에서 근무하는 한 엔지니어는 "과거에는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가까운 밸뷰 지역이 시애틀보다 훨씬 부촌이고, 살기 좋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며 "아마존 기업 한 곳으로 인해 시애틀 지역 경제 전체가 활기를 띠고 있다"고 말했다.
시애틀은 아마존이 급성장하던 2010년대부터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도시가 됐다. 2015년 시애틀의 중위 소득(총 가구 중 소득순으로 순위를 매길 경우 가운데에 해당하는 가구의 소득)은 1년 전보다 무려 13.2%(9374달러) 증가해 8만349달러를 기록했다. 실리콘밸리의 대표 도시인 샌프란시스코(8.2%), 새너제이(4.8%)보다 최대 세 배 이상 소득 성장 폭이 크다. 2015년 미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5만1722달러였다. 단일 기업이 지역 경제에 미치는 영향력이 얼마나 큰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과거에는 지역을 먹여 살리는 것은 산업이었다. 미국 디트로이트를 중심으로 한 지역은 자동차 산업이, 동부 뉴욕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금융 산업이 각각 지역 경제를 이끌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산업이 아니라 단일 기업이 이런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 기업의 덩치가 점점 더 커지고, 지역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도 막대해지면서 시애틀을 먹여 살리는 아마존 같은 케이스가 속속 등장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지역이 실리콘밸리 일대다. 최근 실리콘밸리 최대 도시인 새너제이는 구글과 손잡고 '구글 마을' 건립을 추진 중이다. 구글과 새너제이 시 정부는 약 2만여명의 구글 직원이 근무할 사옥과, 가족들과 함께 살 거주 공간을 공동 개발할 계획이다. 이는 마운틴뷰에 있는 본사와 거의 비슷한 규모의 신사옥을 새로 올리는 것과 비슷하다. 구글 입장에서는 땅값이 비싸고, 인근 주민들의 반발이 심한 마운틴뷰를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고, 새너제이는 세계 최대의 인터넷 기업을 끌어안게 되는 셈이어서 구글과 새너제이 양쪽 모두에게 윈윈이다.
애플 본사가 있는 쿠퍼티노는 '시티 오브 애플(애플의 도시)'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하다. 쿠퍼티노의 애플 본사에서 근무하는 직원 수만 2만3000여명에 달한다. 애플 직원들은 대부분 쿠퍼티노와 그 주변에 거주하면서 지역 경제 활성화에 일조하고 있다. 게다가 애플이 이 일대에 '우주선'이라는 별명의 값비싼 신사옥을 새로 건립함에 따라 쿠퍼티노 시(市)의 자산이 2016년에만 17억달러나 늘어났다.
또 페이스북은 본사 소재지인 멘로파크에 사옥을 늘리면서 직원들이 거주할 아파트까지 함께 짓기로 했다. 주변 지역의 집값 상승을 막고, 건설업 일자리를 대폭 창출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페이스북과 멘로파크가 상생하자는 목적이다.
이렇다 보니 지난 19일 마감한 아마존의 북미 제2 본사 유치전에는 무려 미국·캐나다 일대에서 238개 지방정부가 유치의향서를 제출했을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아마존이 본사를 짓는 조건으로 내건 대규모 부지 제공·대학 소재지·국제 공항과의 인접성 같은 까다로운 요구 사항을 감안했을 때, 사실상 조건을 충족하는 곳은 전부 의향서를 제출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아마존은 이 지역에 5만개 이상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하고 5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낙후된 지역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대규모 투자를 하는 기업도 있다. 최근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세계를 바꾼 56개 기업' 중 1위를 차지한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가 대표적이다. 포천은 선정 이유에 대해 "JP모건체이스는 지역 경제의 부활을 위한 청사진을 새로 쓴 기업"이라고 평가했다.
JP모건체이스가 살려내고 있는 지역은 미국에서도 가장 낙후된 곳 중 하나로 꼽히는 러스트벨트의 디트로이트다. 디트로이트는 글로벌 금융 위기로 인해 지역 내 대표 기업인 GM·크라이슬러 같은 기업이 도산하고 도시 경제가 급속도로 악화돼 2013년 7월에는 시 정부까지 파산할 정도로 무너졌다.
JP모건체이스는 디트로이트를 부활시키기 위해 시 정부와 공동으로 소상공인·창업자 육성에 나서고 있다. 디트로이트의 비영리 단체인 CDFI와 손잡고 이들이 선발한 창업자·소상공인에게 창업 자금을 대출해주는 것이다. CDFI 관계자는 "일반 은행에서는 신용 등급이 낮고 소득 관련 기록이 없어서 대출받지 못하는 디트로이트 주민들이 CDFI와 JP모건체이스로부터 대출을 받아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또 JP모건체이스의 데이터 분석 기술을 활용해 지역 내 소비 규모, 소득, 학교 등을 분석하고 창업자들에게 적절한 타기팅 정보도 제공한다. 이를 통해 디트로이트 지역에서만 약 1만5000여명이 직업 교육을 받았고, 1700여개의 일자리가 새로 창출됐다.
캐나다의 토론토시(市)는 지역 재개발을 위해 구글의 최첨단 기술을 도입한다. 구글의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자율주행차(무인차) 기술 등을 총망라해 토론토의 남동부 일대 12에이커(약 4만8563㎡) 규모를 재개발하는 것이다. 토론토 시 정부는 도시계획 단계부터 AI, 사물인터넷(IoT) 등의 기술을 적용해 공원 벤치의 위치 선정부터 쓰레기 수거, 대중교통, 치안 시스템 같은 인프라를 구축할 계획이다.
미국 내 일각에서는 도시의 기업 유치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도 있다. 아마존·구글 같은 대기업이 순식간에 지역 경제에 진입할 경우에는 여기서 일하는 임직원들이 비정상적으로 물가를 끌어올리고, 여기서 비롯되는 빈부 격차가 급속도로 심화되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실리콘밸리 일대에는 구글·페이스북·애플 등에서 연봉 15만달러 이상을 주고 외부에서 영입해온 인재(人材)들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 미국 각지뿐만 아니라 세계 전역에서 실리콘밸리로 모여드는 이들은 고액 연봉을 받으며 지역 내 아파트 임차료와 물가를 대폭 끌어올리고 있다. 아파트 임대업체에서 부르는 대로 임차료를 지불하다 보니 가격이 치솟는 것이다.
실제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침실 2개짜리 아파트의 월 임차료(중위 가격 기준)는 4553달러에 달한다. 3000달러 수준이었던 2011년과 비교해 보면 50% 이상 급등한 셈이다. 또 미국 1인당 GDP(2015년 5만1722달러)로는 이 지역에서 월세만 감당하기에도 벅찰 정도다. 이에 이곳에는 'RV(레저용 차량) 거주'라는 신종 주거 수단까지 등장했다. 월세가 감당이 안 돼 구형 RV 차량을 구입해 여기서 사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불만 섞인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도무지 집값과 물가를 감당할 수가 없어 수십년간 살던 터전을 떠나 차로 3∼4시간씩 떨어진 곳으로 이사 가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최근엔 구글이 본사가 있는 마운틴뷰에 새로운 사옥을 건립하기로 한 것에 대해 지역 주민들과 지방 정부에서 반대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에 대해 로이터 통신은 "과거와 달리 이제는 일자리뿐만 아니라 지역 인프라 구축과 지역 사회, 환경에 대한 기업의 책임감과 삶의 질 개선까지 감안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