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월, 미국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기억되는 사건이 있었다. 많은 희생자를 낳았고 세계가 경악했던 이때의 참상을 미국은 잊지 않았다.

미국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9·11 메모리얼(9/11 Memorial)은 9·11테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건설된 뉴욕의 기념관 및 박물관이다. 정식 명칭은 National September 11 Memorial & Museum이며 공원과 박물관 등으로 조성돼 있다.

9·11 메모리얼 파크
'9·11'이라고 불리는 이날의 악몽

항공기 납치를 통한 동시 다발 테러가 있었다. 이슬람 원리주의 테러 조직 '알카에다'의 영향을 받은 무슬림들이 저지른 이 미국 대폭발 테러사건(9·11테러사건)으로 3000여 명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픽= 이은경

9월 11일 아침, 4개 조로 나뉜 테러리스트들은 동부 각 도시에서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4대의 항공기를 납치했다. 조마다 훈련된 조종사가 포함돼 있었다. 이 중 뉴욕에서 출발한 항공기 두 대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쌍둥이 빌딩에 충돌했다.

테러사건 당시 사진

아메리칸 항공 보잉 여객기가 오전 8시 46분(동부 표준시 기준)에 북쪽 타워를 들이받았고, 유나이티드 항공 보잉 여객기는 9시 3분에 남쪽 타워에 부딪혔다. 빌딩 안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 중 다수가 즉사했고, 구급 소방 요원들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빌딩이 붕괴할 때 죽거나 잔해 속에 파묻혔다. 빌딩이 무너지며 화염과 연기에 휩싸이는 장면은 TV로 생중계되어 전 세계를 경악과 공포에 몰아넣었다.

세 번째 항공기는 워싱턴 D.C.로 향해 펜타곤(미 국방성)에 충돌했다. 워싱턴 D.C.의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던 것으로 알려진 네 번째 항공기에서는 용감한 승객들이 납치범들에게 저항해 조종간을 빼앗으려 했다. 실랑이 와중에 항공기는 펜실베이니아의 들판에 추락했고, 승객 전원이 사망했다.

붕괴 후 폐허가 된 모습

[2001년 9월 11일 뉴욕에서 발생한 9·11 테러란? ]

["전화끊지 마요, 나 죽는 거죠 엄마한테 전화 좀 해 주세요"]

[[뉴욕 무역센터 구조 현장] "나좀 구해줘요" 절규]

테러와의 전쟁

테러 직후 미국은 전면전(戰)으로 빠르게 대응했다. 테러 9일 만에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규모 군사력을 동원했다. 알카에다가 테러를 계획한 곳이고 탈레반 정권이 그들을 감싼다는 이유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했다. 미국의 첨단 군사력 앞에 탈레반 정권은 붕괴했지만 탈레반은 산악지역에서 게릴라화됐고, 오사마 빈 라덴과 알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 지역으로 은신했다.

이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시작됐다. 미국은 9·11로 드러난 테러단체의 증오심으로 볼 때 대량살상 무기를 동원한 테러도 가능하다고 우려했다. '후세인은 대량살상 무기를 개발 중이며 테러 조직에 이를 확산시킬 것이다' 이것이 미국의 이라크 침공 명분이었다. 미군은 아프간의 탈레반 정권과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을 붕괴시켰다.

"그들은 강철도 산산이 부쉈지만,
미국인들의 강철 같은 결의에는 흠집조차 낼 수 없습니다."
-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미국의 자작극이다"… 음모론은 존재

그러나 여기에는 부시 정권이 벌인 자작극이라는 음모론도 제기되어 왔다.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루스 체인지(Loose Change)'에서는 펜타곤을 공격한 것이 민간 항공기가 아니라 미사일일 가능성이 크고, 월드 트레이드 센터 붕괴 원인은 항공기 충돌 때문이 아니라 미리 장착된 폭탄 때문이며, 항공기 공격을 받지 않은 2개의 건물이 7시간 뒤에 무너진 점 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했다. 영화에서는 이 모두가 미국 정부의 치밀하고도 은밀한 계획하에 실행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미국 정부가 유대인 세력과 공모해 테러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탐지했음에도 고의로 이를 무시하고 테러를 방조했다는 설도 있다. 그 근거로 예기치 않은 테러 장면을 유대인이 장악한 방송사가 실시간으로 촬영했고, 월드 트레이드 센터 임대 비율 20%를 차지하는 유대인 가운데 이 사건으로 사망한 사람은 한 명도 없으며, 사건 직후 아프가니스탄을 공습한 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론들은 규명되지 않았다.

[숨겨놓은 진실 찾기인가… 음모론 자체가 음모인가]

폐허의 현장에서 뉴욕의 상징으로

테러로 무너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 쌍둥이 빌딩 자리 두 곳은 거대한 인공 호수로 바뀌어 있다. 정사각형 인공 호수 가장자리는 9·11 희생자 2993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진 동판으로 둘렀다.

폐허를 말끔한 도심 추모 공원으로 복원한 이곳은 상처를 딛고 일어나는 미국 재건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공원은 지금도 매일 관광객 1만~2만 명이 찾아와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8에이커(3만2000㎡)에 이르는 추모 공원은 큰 인공 호수 2개와 박물관을 제외하곤 모두 나무숲으로 조성됐다. 추모 공원 설계자인 이스라엘 출신 건축가 마이클 아라드는 "추모 공원이 9·11 테러라는 큰 상처를 극복한 뉴욕의 상징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심의 일상적 공간처럼 만들었다"고 말했다.

9·11 메모리얼 파크

[뉴욕 상징이 된 '9·11 공원'… 매일 2만명 추모행렬]

당시 잔해가 그대로… 9·11 추모 박물관

박물관 1층 입구부터 지하 21m에 위치한 주전시실까지 연결되는 기다란 통로에서는 무너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 쌍둥이 빌딩 폐허에서 발굴한 잔해, 구조작업 중 희생된 소방관들이 탔던 소방차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전시돼 있다. 이 차를 타고 출동했던 소방관 11명 전원이 사망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항공기가 직접 충돌한 북쪽 빌딩 93~96층을 받치던 철근 기둥은 폭발의 충격으로 엿가락처럼 휘어 있다.

당시의 끔찍한 현장을 느낄 수 있게하는 소방차(왼쪽)와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안테나 잔해

주전시실에는 희생자 3000여 명(1993년 월드 트레이드 센터 폭탄 테러로 숨진 6명 포함)의 사진과 유품 1만2500점, 구조대원들의 교신 등 음성·영상 기록물 2500여 건이 전시되어 있다. 유족 요청으로 사진 촬영이 금지된 이곳에는 두 빌딩이 무너지는 과정이 시간대별로 소개돼 있다. 당시의 방송 화면과 신문 사진이 끔찍했던 순간을 생생하게 전했다.

폐허를 복원한 9·11박물관은 상처를 딛고 일어나는 미국 재건의 상징이다. 주전시실을 나오면 허드슨강을 막는 제방인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나온다. 이 벽은 테러 당시 붕괴 우려가 제기됐지만, 일부 금 가는 데 그치고 무너지지 않았다. 이 벽이 무너졌다면 해수면보다 낮은 맨해튼 남쪽 지역이 침수되고, 지하철에 바닷물이 유입돼 더 큰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박물관은 "테러에 굴복하지 않는 미국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이 벽에 대한 보강공사를 마친 뒤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했다"고 밝혔다.

[107층서 뛰어내린 절망감… 그앞에 얼어붙은 사람들]

[9·11 잔해가 그대로… 신원 모르는 희생자 1123명 유해도]

월드 트레이드 센터 (World Trade Center · WTC)

미국의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초고층 복합 건물. 110층 짜리 쌍둥이 빌딩으로 유명했던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1973년 4월 4일 개장했다. 실제로는 7개 타워로 이루어진 건물군(群)이었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국제무역의 중추 역할을 하는 뉴욕의 랜드마크이자 미국 경제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물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오는 명소이기도 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미국과 대립하는 국제 테러 단체들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기도 했다.

붕괴 전의 쌍둥이 빌딩

1993년 2월 26일, 2WTC 지하 주차장에서 테러로 인한 폭발물이 터져 6명이 사망하고 1000여 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2001년 9월 11일에는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된 항공기 2대가 각각 1WTC과 2WTC로 돌진해 건물 전체가 붕괴됐으며, 이 110층 짜리 쌍둥이 빌딩의 붕괴 여파로 7WTC도 완전히 무너졌고 나머지 건물들도 대부분 파괴되는 등 대참사가 발생했다. 참사 후 남아 있던 기존 건물은 이듬해에 완전히 철거됐다.

이후, 재건립이 추진되어 주건물인 1WTC가 2014년 11월에 개장했다. 현재 1WTC·4WTC·7WTC 그리고 국립 9·11박물관과 공원이 완공되었으며, 2WTC·3WTC·5WTC, 퍼포밍 아트센터가 들어설 예정이다.


그라운드 제로 (Ground Zero)

본래 핵무기가 폭발한 지점 또는 피폭 중심지를 뜻하는 군사 용어지만, 2001년 9·11 테러 발생 이후 월드 트레이드 센터 붕괴 지점을 뜻하는 고유명사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라운드 제로의 사전적 의미는 (폭탄의) 낙하점, 핵폭발 바로 아래 혹은 위의 지점을 뜻한다.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

처음으로 '그라운드 제로'라는 말을 쓴 것은 1946년, 뉴욕타임스(NYT)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피폭지점을 일컫는 말로 쓰였다. 이후 핵폭탄이나 지진과 같은 '대재앙의 현장'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또 이 말은 '급격한 변화의 중심' 또는 '사물의 가장 근본적인 시작점'으로 확장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종교적 의미로는 성지 예루살렘을, 더 광범위하게는 우주의 시작점을 일컫기도 한다. 그라운드 제로는 2001년 미국에서 한 해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라운드 제로에서 21세기 뉴욕을 보다]


오사마 빈 라덴 (Osama bin Laden)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국제 테러리스트. 이집트 과격단체들과 동맹을 맺고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자신이 조직한 테러 조직 알카에다를 통해 국제적인 테러를 지원하기 시작하여 미국 대사관 폭탄 테러와 9·11 미국 대폭발 테러 등의 배후자로 지목됐다.

빈 라덴은 아프가니스탄에 머물면서 자신이 이끄는 조직 알카에다를 중심으로 전 세계 이슬람 테러 조직에 자금을 지원한 것으로 알려졌고, 미국은 1998년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빈 라덴의 기지와 수단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화학무기 공장에 미사일 공격을 명령하기도 했다.

그는 1999년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 숨어 지내면서 지속적인 대미 테러 활동을 벌여왔는데, 2001년 9월 11일 발생한 미국 맨해튼의 110층짜리 쌍둥이 빌딩인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펜타곤에 대한 항공기 납치 자살테러 사건 등 역시 그가 조종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1년 10월 말 미국은 그가 숨어 있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전면전 공격과 국제 테러 조직들에 대해 무차별 응징을 선언했다. 수년간 은신 생활을 해온 오사마 빈 라덴은 2011년 5월 파키스탄의 수도인 이슬라마바드 외곽에 있는 한 가옥에서 미군 특수부대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다.

[[빈 라덴 사살] 그라운드 제로의 시민들 밤새 "USA!" 외치며 승전 환호]

끔찍한 테러의 기억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2006년에 개봉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테러 당시의 끔찍한 모습을 재현했고, 뉴욕 시민들의 희생과 생존자들의 감동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납치된 항공기 실화를 다룬 영화 플라이트 93(United 93)은 앞서 연쇄 충돌한 3대의 항공기 외에 마지막에 공중 납치된 4번째 항공기에서의 비극을 재현했다. 이 외에도 미국 문화계는 이날의 아픔을 다양한 영화에 꾸준히 녹여내고 있다.

[[Why] [그 작품 그 도시] 영화 '레인 오버 미'_ 맨해튼]

[누구도 믿을 수 없다… 9·11 테러, 그날의 진실은?]

["아직도 신발장엔 당신 신발… 10년 지나도 못 버리겠어요"]


■ 참고
911 Memorial - www.911memorial.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