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 A(43)씨는 최근 업무상 스트레스로 급격한 우울증에 빠졌다. 사소한 오해가 와전되면서 부처에 자신이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소문이 난 것이다. 심한 불면증과 불안 증세에 시달리면서도 인사상 손해를 볼 것 같아 정신의학과를 찾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억울하다는 생각이 커지면서 자살을 기도하기까지 했다. 남편에게 발견돼 정신과에 긴급 입원한 A씨는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정신과 진료 사실이 알려질까 봐 걱정하는 마음이 컸다"고 했다.
◇방치하면 '감기'가 '암'으로
'마음의 감기' 같은 우울증을 방치하면 '암' 수준으로 커져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간단한 치료로 호전될 수 있는데도 많은 사람이 우울증 치료받기를 꺼리면서 심각한 현상까지 치달을 수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우울증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과 사회적 차별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라고 말한다. 2016년 보건복지부 정신질환실태조사에서 우울증 환자 479명에게 '과거에 치료를 안 받은 이유'를 물었더니(복수응답)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응답이 75.9%로 가장 많았다. '다른 사람이 알면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돼 치료를 받지 않았다'는 응답도 30.5%에 달했다.
삼성서울병원 홍진표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중증 우울증은 당뇨병처럼 호르몬 분비 등 생화학적 문제로 감정 조절이 어려워지는 증상이기 때문에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체면을 중시하고, 비정상에 대한 거부감이 커 정신과 진료에 소극적"이라고 말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가 우울증 환자 573명에게 "자신이 우울증이라고 생각했느냐"고 물어보니 응답자 70%(401명)가 "아니다"고 답했다. 이들 다섯 중 하나(19%)는 다른 진료과나 치료기관 등 3곳 이상을 거치고 나서야 정신과를 찾아갔고, 증상을 발견하고 처음 진료를 받기까지 평균 7년이 걸린 것으로 조사됐다. 우울증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면서 치료 적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정신 치료 기록은 의료법으로 보호
정신과 진료를 가로막는 또 다른 장벽은 진료 사실이 알려졌을 때 받을 사회적 차별에 대한 두려움이다. 전문가들은 "정신과 진료 기록은 의료법으로 보호받기 때문에 본인 동의 없이 회사가 이를 알기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보험사에서 보험금을 지급할 때 진료 기록을 확인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 결과도 외부로 유출되지는 않는다. 홍 교수는 "30년 가까이 정신질환을 진료하면서 인사상 불이익 받았다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 없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민간 의료보험에 가입할 때 정신과 진료 전력을 묻거나 일부 회사에서 정신과 진료 기록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어서 환자 불안을 가중시킨다. 이 때문에 일부 환자는 우울증 치료 사실을 숨기려고 비싼 돈을 내면서까지 건강보험 적용을 거부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정신과 진료 기록에 대해 부담을 갖자 정부는 2012년 건강보험 청구 항목에서 '정신과 상담 기록'(F코드)을 일반 상담 기록(Z 코드)으로 변경하기도 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남에게 관심이 많은 한국 특유의 집단주의 문화에서 나쁜 소식이 금세 퍼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특히 눈치를 보는 것"이라며 "환자들에게 사생활이 지켜진다는 더 확실한 믿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신과 진료에 대한 오해 때문에 진료를 꺼리는 경우도 있다. 정신과 진료는 비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1회 진료에 3만~4만원 선이라 큰 부담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정신과 약을 복용하면 지능이 떨어진다거나 약에 중독된다는 속설도 사실이 아니다. 다만 낮은 정신과 진료비(수가) 때문에 의사들이 박리다매식으로 '3분 진료'를 하는 일이 많아 인식이 나빠졌다는 지적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