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된 성행위의 정의가 미국 사회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최근 불거진 유명 코미디 배우 아지즈 안사리의 성추행 논란이 기폭제 역할을 했다.

논란은 여성전문매체 베이브가 14일(현지시각) 한 익명의 여성과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하면서 시작됐다. 신원 보호를 위해 ‘그레이스’라는 가명을 사용한 이 여성은 지난해 그녀가 안사리와 보낸 하룻밤의 데이트를 상세히 전하며 성추행 피해를 주장했다.

기사에 따르면 그레이스는 지난해 한 파티에서 안사리와 만나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이후 약 일주일간 연락을 주고받던 그들은 첫 데이트를 하기로 했다. 문제는 데이트가 끝나고 찾은 안사리의 아파트에서 일어났다. 그레이스는 이후 벌어진 일들에 대해 “너무 빠르게 벌어져 불편함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온라인 여성전문매체 베이브는 14일(현지시각) 미 유명 코미디 배우 아지즈 안사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한 여성과의 인터뷰 기사를 홈페이지에 게재했다.

사람들은 그레이스의 폭로 대상이 다름 아닌 안사리인 점에 충격을 금치 못했다. 인도계 미국인 배우인 안사리는 2014년 CBS 토크쇼 ‘레이트 쇼 위드 데이비드 레터맨’에 출연해 “남성과 여성이 평등하다고 믿는다면 당신도 페미니스트”라며 자신 역시 페미니스트라고 밝힌 바 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스탠드업 코미디쇼 ‘아지즈 안사리: 매디슨 스퀘어 가든 라이브’, ‘아지즈 안사리: 생매장’ 등에서도 페미니즘을 비롯해 다양한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앞서 7일에는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마스터 오브 제로’로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주연상을 수상했다. 안사리가 감독이자 주연을 맡은 이 시리즈는 인종·성차별 문제 등을 다루며 미국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는다. 안사리는 이날 시상식에 ‘타임스 업(times up)' 배지를 달고 참석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타임스 업은 할리우드를 비롯한 미국 전역의 성폭력과 성차별 문제 해결을 위해 형성된 운동이다.

◆ 그레이스 “안사리, 내가 보낸 명백한 거절 신호 무시”

그레이스의 주장을 바탕으로 그날의 일을 정리하면 이렇다. 안사리는 자신의 아파트에 도착함과 동시에 그레이스에게 키스를 한 뒤 그녀의 옷을 벗겼다. 이윽고 콘돔을 가지고 오겠다는 그에게 그레이스는 “잠시 진정하고 쉬자”고 말했다. 하지만 안사리는 아랑곳 하지 않고 키스를 이어갔고, 이내 구강성교를 해주며 자신에게도 같은 행위를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후로도 안사리는 그레이스의 성기를 만지고 자신의 성기에 그녀의 손을 갖다대는 등 여러 차례 유사 성행위를 시도했다. 그레이스는 “30여분간 그를 피해 자리를 옮기고 몸을 움직였지만 안사리는 계속해서 이같은 행위를 반복했다”며 “그만두고 싶다는 신호를 계속해서 보냈지만 그가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느꼈던 거라면 내 신호를 무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그레이스는 “어디에서 섹스를 하고 싶냐”고 묻는 안사리의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차마 그와 섹스를 하고 싶지 않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대신 그녀는 안사리에게 “떠밀려서 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당신을 미워하게 될 것 같다”고 우회적으로 말했다. 이에 안사리는 “당연하다. 두 사람이 함께 즐겨야 진짜 즐거운 거다”라면서도 계속해서 그녀의 몸을 만지고 구강성교를 요구했다. 그레이스는 “강한 압박을 느껴” 그의 행동에 일부 동참하기는 했지만 이내 “하기 싫다.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을 분명히 전했다고 했다. 안사리는 그녀의 말에 수긍하며 다시 옷을 입었고, 그레이스 역시 옷을 입고 안사리와 TV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사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레이스에게 키스를 시도하며 그녀의 바지를 벗기려 했다. 결국 참지 못한 그레이스는 “남자들은 다 똑같다”고 말하며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레이스가 자신의 휴대폰을 챙기는 등 떠날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안사리는 그녀에게 두번의 키스 시도를 했다.

그레이스와 안사리가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 내용.

안사리는 15일 해당 기사에 대해 “모든 점을 미루어보아 합의 하에 이뤄진 일이었다”는 공식 입장을 밝혔다. 그는 입장문을 통해 “내게는 (그날 있었던 일이) 모두 괜찮아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매우 놀랐고 걱정이 됐다”며 “나는 그녀의 말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곰곰이 생각해 본 후에 개인적으로 답장했다”고 전했다.

그레이스는 앞서 안사리가 보낸 “어젯밤 즐거웠다”는 문자 메시지에 “당신은 그랬는지 모르지만 난 아니다. 당신은 내가 보낸 명백한 거절 신호를 무시했다”고 답장했다. 안사리는 이에 “그런 말을 듣게 돼 정말 슬프다. 내가 그 순간 신호를 잘못 읽은 것 같다.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답했다.

◆ 美 ‘어디부터가 성폭력인가’ 논쟁 격화

베이브의 보도는 현지 언론들 사이에서 엇갈린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특히 안사리의 행동이 과연 성폭력으로 간주되는지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날로 거세지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사설을 통해 ‘불편했다’는 이유로 안사리를 성폭력범으로 몰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NYT는 “안사리의 죄는 그레이스의 마음을 읽지 못한 것이 전부”라며 “이같은 문제의 해결책은 여성이 좀 더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데에 있다”고 전했다. “‘나쁜 섹스’마저 범죄화하는 것은 여성의 인권을 오히려 후퇴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애틀랜틱은 여기에 ‘페미니즘 운동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의견을 더했다. 케이틀린 플레너건 객원 편집자는 “그레이스는 당시 두려움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게 아니다. 그녀는 안사리로부터 애정과 친절, 관심을 받고 싶어했다. 어쩌면 유명인의 여자친구가 되기를 원했을지도 모른다”면서 “안사리가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자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고, 3000자에 달하는 리벤지 포르노로 그의 커리어를 살해(assassinate)했다”고 비난했다.

미국 CNN방송의 자매 채널 HLN의 애슐리 밴필드 호스트는 17일(현지시각) 공개 편지를 통해 그레이스를 비난했다.

베이브의 기사로 인해 ‘미투(#MeToo) 운동’의 본질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미투 운동은 성폭행 피해 사실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취지로 하며,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거물 영화 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미국 CNN방송 계열 채널 HLN의 애슐리 밴필드 호스트는 그레이스에게 전하는 공개 편지를 통해 “(안사리의 행동은) 당신 말대로 강간도 아니고 추행도 아니다”며 “당신은 나를 비롯한 많은 직장 여성들이 수십년간 꿈꿔왔던 운동을 깎아내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있다. 인터넷매체 ‘복스’(Vox)는 그레이스의 이야기가 비단 안사리 한 사람의 행동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안나 노스 젠더전문기자는 “많은 남성이 안사리의 입장에서 그레이스의 이야기를 상상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그들이 우리 문화가 가르쳐준대로 행동한다는 것을 반증한다”며 “그레이스의 이야기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남성들에게 이같은 사실을 인정하고 보다 나은 행동, 즉 여성들에게 섹스를 강제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노스 기자에 따르면 남성은 어려서부터 대중 문화와 주변 어른, 친구들로부터 ‘여성에게 나와 섹스를 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배운다. 이렇게 교육받은 남성에게 섹스를 위해 여성의 권리를 침범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반면 여성은 남성을 거부하는 것이 무례하다고 가르침 받는다. 남성이 여성에게 섹스를 집요하게 요구하면 억지로라도 응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메건 가버 애틀랜틱 문화부 기자도 노스 기자와 의견을 같이 했다. 가버 기자는 ‘아지즈 안사리와 거절의 역설’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그레이스의 태도를 역설적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오늘날 여성들이 어느 정도까지 여성성을 강요받는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며 “그레이스의 이야기는 결국 선택의 여지가 없어질 때까지 ‘싫다’는 말 대신 다른 방법으로 소통하려고 했던 한 여성의 이야기”라고 말했다.

“진정한 페미니즘을 논하기 앞서 공부부터 하고 오라”는 핀잔도 나왔다.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의 저자 린디 웨스트는 NYT 기고문에서 “‘적극적인 동의(affirmative consent)’라는 개념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며 “미투 운동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페미니즘에 부여한 ‘낙인’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라”고 조언했다. 미 캘리포니아 주는 2016년 성폭행의 정의를 확대하며, 적극적인 동의 여부를 주요 판단 기준으로 세웠다. 침묵이나 소극적인 저항, 취중 동의 등 불명확한 의사 표현은 사실상 동의한 것과 다름없다는 변명을 원천봉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