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풋풋하다. 메이크업한 듯 하지 않은 듯 과하게 진하지 않은 와인 맛과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이게 정말 호주 와인인가?' 생각하며 자꾸 와인잔을 기울여 홀짝였다.

호주 멜버른 인근 야라밸리에 있는 와이너리 리틀 레디(Little Reddie)의 스파클링 와인 라벨은 와인메이커 팻 언더우드의 누드 사진이다. 병 뒤에 붙은 백라벨에는 ‘더하지도 빼지도 않았다(Nothing added, noting taken away)’라고 적혀 있건만, 언더우드의 ‘중요 부위’가 인조 크리스털로 가려져 있다. / Kimberley Low

호주 와인은 그동안 복잡하지 않고 쉽다고 알려져 왔다. 덕분에 세계적으로 큰 사랑 받았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잘 익은 포도로 빚은 달콤한 와인을 오크통에 숙성시켜 진하게 맛 낸 스타일이었다. '크고(big)' '진하고(bold)' '노골적(in-your-face)'이기로 유명했다. '과일 사탕(fruit bomb)'이라 불리기도 했다. 화장(化粧)에 비교하면 화려한 색조 화장이랄까.

한적한 캔버라에서 생산되는 섬세한 와인

메이크업 트렌드가 바뀌듯 와인 입맛도 바뀐다. 2000년대 접어들며 세계 와인 시장이 강하고 진하기보단 내추럴 메이크업처럼 섬세하고 우아한 와인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호주 대표 포도 품종으로 진하고 묵직한 와인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쉬라즈(shiraz)나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으로 만든 강렬한 와인이 워낙 인기다 보니 가려졌을 뿐, 호주에서는 우아하고 섬세한 와인이 그동안 꾸준히 생산되고 있었다.

캔버라 콜렉터(Collector) 와인은 차분한 라벨만큼이나 정갈하고 세련된 맛이다.

캔버라 지역 와인이 대표적이다. 한적하고 조용하다 못해 지루하고 심심하다 해서 한국 교민들이 '캔담사(캔버라+백담사)'라 부른다는 호주 수도 캔버라는 덜 알려져서 그렇지 호주의 주요 와인 산지 중 하나다.

1971년 이곳에서 와인을 만들기 시작한 '클로나킬라(Clonakilla)'는 캔버라를 세계에 알린 와이너리. 쉬라즈 품종에 비오니에(Viognier) 품종을 조금 섞는 블렌딩을 처음 시도했다. 비교적 서늘한 캔버라 기후 덕에 무겁고 강렬한 쉬라즈가 아닌, 과일·꽃 향이 풍부하면서도 우아한 와인은 애호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이제 쉬라즈와 비오니에를 블렌딩한 와인은 캔버라를 대표하는 와인 스타일이 됐다.

차분하고 정갈한 라벨처럼 포도 품종 자체의 매력을 은근하게 드러내는 와인이 장기인 '콜렉터(Collector)', 우아하고 섬세한 와인을 만드는 대표 품종 피노누아(pinot noir) 와인에 주력하면서 레드·화이트 와인의 매력을 섞은 듯한 로제 와인 두 종류 만드는 '레리다(Lerida)', 본고장 독일보다 더 뛰어난 리슬링(riesling) 화이트 와인을 생산한다 자부하는 '헬름(Helm) 와이너리' 등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캔버라를 대표하는 와인들이다.

명성 되찾는 우아한 와인 산지 야라밸리

시드니에서 차로 3시간 올라가면 나오는 헌터밸리 토마스(Thomas) 와이너리 대표 앤드루 토마스가 시음용 와인을 오크통에서 따르고 있다. / Kimberley Low

멜버른에서 멀지 않은 야라밸리(Yarra Valley)는 1970년대까지 꽤 잘나가는 와인 산지였다. 피노누아를 주력으로 하는 미디엄보디(너무 강하거나 진하지 않은 중간급 맛·농도) 레드 와인을 잘 만들었다. 하지만 1980년대 대형 호주 와인업체들이 진하고 마시기 쉬운, 전형적인 호주 와인을 밀어붙이면서 상대적으로 소외됐다. 그러다 세계 와인 트렌드가 바뀌면서 다시 부각되고 있다.

'타라와라(Tarra Warra) 와이너리'에서 지역 대표 와인 수십 가지를 맛봤다. 화이트 와인은 샤르도네, 레드 와인은 쉬라즈 품종으로 만든 것들만 비교 시음했다.

호주 와인은 오크(참나무)를 과하게 써서 강한 맛과 향을 낸다고 알려져 왔다. 와인을 오크통에 숙성시키면 참나무에서 우러나온 바닐린 성분 때문에 향긋한 바닐라 향과 토스트한 빵과 같은 구수한 맛이 와인에 배어든다. 하지만 오크 사용이 과하면 와인 본연의 맛을 가리고 인위적인 맛이 난다.

① 캔버라를 세계 와인 지도에 확실하게 자리매김하게 한 클로나킬라(Klonakilla)의 마케팅디렉터 데이비드 레이스트가 포도밭에서 클로나킬라 와인에 들어가는 주요 포도 품종 쉬라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② 캔버라 마운트 마주라(Mount Majura) 와이너리의 피노누아 포도밭. 강하고 진한 와인보다 섬세하고 우아한 와인이 트렌드가 되면서 이러한 와인을 만드는 데 적합한 피노누아가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다. ③ 호주 와인 산지를 구성하는 다양한 토양 샘플. 테루아(terroir)라고 하는 와인의 개성은 대부분 땅에서 나온다. / Kimberley Low

시음한 야라밸리 와인들은 그렇지 않았다. 샤르도네 화이트 와인이나 쉬라즈 레드 와인이나, 오크 향은 살짝 감췄달 만큼 자제하면서 와인 본연의 풍미가 입안에서 기분 좋게 피어났다.

야라밸리에는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서 대대로 와인을 만들던 집안 출신인 도미니크 포르테(Portet), 독일 와인 생산 가문 출신 티모 메이어(Mayer) 등 유럽에서 건너온 와인 생산자도 많다. 메이어는 "1988년 정착할 때만 해도 이 지역이 꽤 서늘했는데 지금은 훨씬 더워졌다"며 "더 높은 지대로 포도밭을 옮겨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무모한 도전으로 진화하는 호주 와인

① 독일에서 이주한 티모 메이어(Mayer)가 야라밸리에서 생산하는 레드와인. ② 헌터밸리 오크베일(Oakvale) 와이너리 ‘EXP. 레스토랑’에서 메인요리로 제공하는 캥거루 스테이크. ③ 크링클우드(Krinklewood) 와이너리의 피터 윈드림은 인위적 간섭을 최소화한 내추럴 와인을 생산한다. 달 기울기에 맞춰 수확 시기를 정하고 인공 비료 대신 동물 똥으로 채운 소뿔을 포도밭에 묻는 윈드림은 “개, 소 등 와이너리에 거주하는 동물들도 와인 생산에 중요한 일부분”이라고 했다. / Kimberley Low

시드니는 호주 와인 역사의 출발점이다. 1788년 남아공에서 가져온 포도나무를 시드니에 심으면서부터다. 시드니에서 차로 3시간 거리인 헌터밸리(Hunter Valley) 대표 포도 품종은 세미용(semillon). 호주에서 가장 오래된 와이너리 중 하나인 '티렐(Tyrelle's)'을 비롯, 이 지역 와이너리들은 가볍고 산뜻해서 연어 스테이크이나 프라이드치킨을 먹을 때 기름기를 깔끔하게 씻어내는 화이트 와인을 빚어낸다.

헌터밸리에서 호주 와인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젊은 와인업자 둘을 만났다. '크링클우드(Krinkewood)' 주인 피터 윈드림은 내추럴 와인(natural wine) 신봉자다. 내추럴 와인이란 유기농 와인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포도 재배와 와인 양조에서 인위적 개입을 최소화한 와인을 말한다. 보름달·반달·초승달 등 달 기울기에 맞춰 수확 시기를 정하고, 발효가 진행될 땐 포도 앞에서 피아노를 친다. 토양을 비옥하게 하기 위해 소뿔에 동물의 똥을 채워 땅에 묻는다. 그는 "와인은 우주의 기운이 모여 만드는 것"이라 주장한다.

'하컴(Harkham)' 대표 리처드 하컴은 내추럴 와인이자 동시에 코셔 와인(kosher wine)을 만든다. 코셔란 유대어로 '적당한' '합당한'이란 뜻으로, 전통적인 유대교 율법에 따라 생산한 음식·음료를 말한다. 모든 와인 생산 과정은 랍비(유대율법교사) 감독 아래 진행된다.

코셔 와인은 제약도 까다롭고 돈도 많이 든다. 와인 발효 탱크는 오직 랍비만이 만질 수 있다. 그러니 와인 생산하려면 랍비가 꼭 있어야 하는데, 시드니에서 랍비를 모셔오려면 하룻밤에 500호주달러(약 43만원)나 지불해야 한다. 뚜렷한 소신 없이 못 할 일. 하컴은 "이렇게 생산해야 한다고 믿는다"고 했다.

어찌 보면 무모하고 돈 되지 않는 시도들, 하지만 이러한 도전이 끊임없이 이뤄지기에 호주 와인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