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의 벽돌책' 원고도 벌써 13회인데, 읽는 재미로는 아마 이 책이 으뜸일 것이다. 신판 기준으로 832쪽인 이 작품을 나는 이틀 만에 다 읽었다. 영국 소설가 세라 워터스가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 쓴 레즈비언 소설 '핑거스미스'(열린책들)다.
지금은 책을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박찬욱 감독의 2016년작 영화 '아가씨'의 원작으로 낯설지 않은 소설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국내에 들여온 2006년 출판사의 마케터는 얼마나 난감했을까. 빅토리아 시대? 레즈비언이 주인공인? 아직 한 작품도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작가가 30대에 쓴? 게다가 이렇게 두꺼운? 김영준 열린책들 문학주간은 "그런 장애 요인 때문인지 영국에서는 출간 즉시 BBC가 드라마 제작을 결정한 화제작이었는데 한국 출판사들은 판권에 별 관심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좋은 책은 결국 독자가 알아보는 것 같다. 한국에서도 이 작품은 성공했다. 외국 소설로는 매우 드문 판매 곡선을 그리며 큰 기복 없이 매해 꾸준히 잘 팔렸다. 영화 '아가씨'가 나오기 전에 이미 2만부 이상이 팔렸다. 2016년에는 3만부가 나갔다.
어떤 작품의 성공 비결을 사후적으로 분석하는 것은 늘 머쓱한 일이다. 특히 핑거스미스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성공 비결? 펼치면 놓지 못하는 책이다. 저마다 다른 개성과 욕망을 지닌 등장인물이 딱 적당한 수로 등장해 제각각 음모를 꾸미고 계략을 짜는데 모두 뜻대로 안 되고, 예상치 못한 반전이 몇 번이나 벌어진다. 그리고 야하다.
그 표면의 매력이 글자 아래 좀 더 깊은 곳에 있는 다른 장점을 가리지 않을까 우려마저 든다. '진상이 뭐야? 얘들 어떻게 되는 거야?'라는 기분으로 한 번 읽고, 복선과 암시를 살피며 한 번 더 읽고, 줄거리와 인물을 떠난 곳에 층층이 쌓인 역설과 아이러니를 음미하며 삼독해도 여전히 즐거울 소설이다.
페미니즘, 동성애, 계급 갈등, 진실과 거짓 등 생각해볼 키워드는 무척 많지만 나는 무엇보다 책에 대한 책으로 읽었다. 인간을 억압하는 책과 사악한 독자들, 그리고 소설가를 구원하는 문맹에 대한 이야기다. 다른 층위에서는 정반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어떤 층에서나 비비 꼬여 있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영상 매체의 시대에 문학이 어떻게 살아남을까'를 노골적으로 묻고 답을 멋지게 제시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공교롭게도 영화 '아가씨'의 각본은 원작의 뒷부분을 크게 바꾸면서 바로 그 질문을 피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