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폐회식 의상 디자인한 금기숙 의상 감독
피켓 요원 의상, 한국인의 에너지와 생명력을 '율동미'로 표현한 것
신화 속 웅녀가 풍성한 여인상으로, 벽화 속 여인이 막 튀어나온 듯...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21세기형 한복'으로 시각효과 극대화

지난 22일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을 앞둔 금기숙 의상감독이 평창올림픽스타디움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이 17일간의 뜨거운 일정을 마치고 막을 내렸다. 25일 열린 폐회식은 ‘미래의 물결(The Next Wave)’를 주제로, 기존의 틀을 깨고 앞으로 나아가는 도전정신이 돋보였다. 총 4개의 문화 공연은 조화와 융합을 통한 공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평화의 메시지를 한국적인 색채와 혁신적인 현대 아트의 결합으로 표현했다.

의상도 흰 옷에 물감을 흩뿌린 액션 페인팅 기법을 사용하거나, LED 조명을 적용해 자유롭고 미래적인 분위기로 연출됐다. 태극기 운반수의 모습도 달라졌다. 개막식에선 한복을 입은 메달리스트들이 태극기를 운반했지만, 폐막식에선 태극기의 색상과 건곤감리를 활용한 망토를 입은 어린이들이 등장했다. 의상을 만든 금기숙 의상 감독은 “미래의 물결이라는 주제에 맞게 의상에서도 좀 더 현대적인 한국의 멋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폐회식을 앞둔 지난 22일, 강원도 평창군 평창올림픽스타디움에서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의상을 디자인한 금기숙 의상 감독(홍익대 섬유미술패션디자인과 교수)을 만났다. 금 감독은 이번 개폐회식에서 웅녀 의상과 피켓 요원의 ‘눈꽃의상’, 오륜기·태극기 운반수 의상 등을 만들었다. 전날 모의 폐회식을 마치고 늦도록 회의를 했다는 그의 얼굴은 피곤함보다는 설렘과 열정으로 가득했다.

◇ 한국의 미의 정수는 ‘떨림’, 피켓 요원 의상 ‘한국인의 에너지’ 표현한 것

25일 열린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에서 23명의 어린이가 태극기를 게양하기 위해 무대로 등장하고 있다. 태극기의 빨강과 파랑, 흰색과 건곤감리를 문양으로 활용한 망토 형식의 의상이 눈길을 끈다. 폐막식에서 태극기를 운반하는 어린이들의 의상은 금기숙 감독이, 무용수들의 의상은 송자인 감독이 제작했다.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회자됐던 건 개회식에서의 피켓 요원의 의상이다. “선수 입장 시 등장하는 피켓 요원이 인기를 끌면 그 올림픽은 성공한다”는 말이 있을만큼 피켓 요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이번 올림픽 개회식에서는 동화 속 눈꽃요정처럼 분한 피켓 요원이 화제를 모으며, 올림픽의 흥행을 예고했다. 실제로 국제올림픽조직위원회(IOC)는 22일 “입장권이 목표치의 98.7%가 팔리는 등 역사상 최고의 동계올림픽이었다“라고 평가했다.

피켓 요원의 눈꽃 의상은 흰색 철사에 반짝이는 구슬과 비닐 등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제작됐다. 총 91벌의 의상은 형태와 길이, 구슬의 색이 각각 다르다. 이는 각기 다른 땀방울을 엮어 하나 된 열정을 형상화한 것으로, 평창 동계올림픽의 슬로건인 ‘패션, 커넥티드(Passion, Connected)’를 의미한다. 수작업으로 제작됐고, 제작 기간만 6개월이 걸렸다.

9일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KOREA' 피켓 요원이 남북 선수들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오른쪽은 금 감독의 의상 드로잉.

철사에 구슬을 꿰어 옷을 짓는 방식은 금 감독이 20여 년간 해온 작품 방식이기도 하다. 금 감독은 눈꽃 의상이 “한국인의 생명력과 에너지를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한국미의 정수는 ‘흔들림’과 ‘떨림’이다. 움직임과 생명력, 자연의 에너지를 수용하는 아름다움은 한복만이 가진 특징이다. 저고리의 고름과 치마의 날림, 족두리의 떨새 장식, 저고리에 다는 노리개 등 한복은 율동미가 돋보인다. 이는 일본의 기모노나 중국의 치파오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의 아름다움이다.”

눈꽃 의상에는 이 외에도 한국의 미가 곳곳에 숨어있다. 의상 안에는 솜을 넣어 누빈 보디슈트를 입고 목에 긴 목도리를 둘렀는데, 목도리를 삼각 형태로 겹쳐 저고리의 깃과 동정처럼 연출했다. 눈꽃 의상의 풍성한 치마 형태도 한복 치마의 볼륨감을 살린 것이다.

처음엔 ‘한복이 아닌’ 피켓 요원의 의상을 염려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개막식을 본 사람들은 ‘동화 속 요정이 등장하는 것 같았다’ ‘피켓 걸 의상에 눈이 팔려 선수들이 눈에 안 들어왔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개막식이 끝남과 동시에 SNS에는 플래카드 요원을 ‘눈꽃요정’으로 묘사한 팬아트들이 등장했다.

금 감독은 “과연 궁중의상을 입었으면 재미있었을까?”라고 반문하며 “차기 동계올림픽이 중국과 일본에서 연달아 개최되기 때문에, 보편적인 상식을 깨면서도 우리의 아름다움을 표현할 예술작품을 만들고자 했다. 이렇게 뜨거운 반응을 얻을 줄은 몰랐다. 피켓 요원들도 무척 뿌듯해하고 있다”고 웃었다.

◇ 신화 속 웅녀과 벽화 속 여인들과 춤을…‘한복이 이렇게 아름다웠나’

평창동계올림픽 개폐회식엔 금 감독을 비롯해 이영희, 송자인, 진태옥 디자이너가 의상 감독으로 참여했다. “우리의 전통 의상인 한복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도,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21세기형 의복을 선보이는 것이 목표였다”는 게 금 감독의 설명이다.

금 감독은 개회식 의상을 구상하기에 앞서 세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국제 사회에 한국을 알리는 행사인 만큼 한국적인 멋을 보여줄 것. 둘째, 세계인이 봐도 낯설지 않은 공감 요소를 반영할 것. 셋째, 지붕 없는 스타디움의 특성을 고려해 보온성을 갖출 것.

한편으로는 평창의 바람을 이용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금 감독은 “모든 의상은 율동미를 살렸다. 웅녀는 물론 태극기·오륜기 운반수 등 모든 옷에 장식을 부착하거나 트임을 줘 바람이나 몸의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평화의 땅’ 공연 한 장면. 치마의 풍성한 형태를 살린 웅녀의 의상은 금기숙 감독이, 고구려 벽화 속 여인으로 분한 무용수의 의상은 송자인 감독이 제작했다.

단군과 웅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평화의 땅’ 공연 의상은 고구려 의상을 바탕으로 제작했다. 웅녀는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 나오는 민족의 시조모(始祖母)로, 스무날 동안의 기도 끝에 곰에서 사람으로 변했고 환웅과 결혼해 단군을 낳았다. 웅녀의 한복은 고대 의상과 조선 시대 활옷을 접목했다. 소매 끝과 목선, 밑단에 고대 의상의 특징인 선 장식을 넣고, 허리선을 가슴까지 올리고 치마를 부풀려 신화 속 여인의 풍성한 여성미를 살렸다.

웅녀와 함께 등장한 무용수들은 고구려 고분 벽화 속 여인을 재현했다. 의상을 담당한 송자인 감독은 벽화 속 여인들이 그대로 나온 듯한 느낌을 주기 위해 전통 복식을 고증하기보다는, 치맛단을 비대칭으로 디자인해 극적인 효과를 강조했다. 원형 무늬는 화선지에 퍼진 먹물처럼 음영 효과를 줬다.

역대 올림픽 스타로 구성된 개막식 태극기 운반수는 솜을 넣어 누빈 흰색 도포형 두루마기를 입었다. 두루마기 뒤엔 전삼(뒷자락)을 달아 바람에 펄럭이도록 했고, 머리에 쓴 전통모 풍차와 가슴에 묶은 허리띠 세조대에 오륜색을 적용해 올림픽의 의미를 부여했다. 풍차에는 오화진 작가의 공예 작품을 장식했다.

개회식에서 태극기 운반수의 의상은 흰색 도포에 오륜기의 색을 넣은 풍차와 새조대를 매치해 한국의 미를 선보였다.

모든 의상은 연기자들이 영하의 기온에도 체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솜을 넣어 제작했고, 곳곳에 핫팩을 붙였다. 다행히 공연을 마친 연기자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무대 뒤로 돌아왔다고.

금 감독의 남편은 유창종 변호사다. 와당과 도용(흙인형)을 수집하는 취미를 가진 부부는 유금와당박물관을 운영하고 있다. 두 사람은 올림픽과도 인연이 깊다. 유 변호사는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올림픽조직위원회 법무실장으로 참여했다. 금 감독은 “운이 좋게도 ‘올림픽 부부’가 됐다. 평창동계올림픽은 나와 내 주변인들에게도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 특히 국민들이 개폐회식과 의상을 인상 깊게 봐주어 감사한 마음”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