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흔적 '선'으로 연결해 표현
3개 공간에 3가지 이야기 담아 유대인들의 죽음 추모
유대인박물관 건설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철저한 역사의식에서 출발됐다. 유대인 건축가 다니엘 리베스킨트는 유대인박물관에 이러한 역사의식을 담았고, 박물관 디자인에도 유대인의 흔적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리베스킨트는 유대인의 흔적을 유대인 거주지에서 찾아, 거주지를 선으로 연결하여 표현했다. 거주지에 살던 사람들은 과거에 베를린에 살며 핍박받았던 유명한 유대인 작가, 작곡가, 예술가, 과학자, 시인 등이다.
날카로운 선들(Lines)은 유대인 다윗 왕을 상징하는 별의 이미지이며, 별이 움직이는 형태로 표현했다. 유대인박물관의 두 개의 건물은 두 개의 선을 상징한다. 한 선은 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문화 교류로 로마 시대부터 현대까지의 2000년의 역사와 삶, 문화 예술을 뜻한다. 다른 한 선은 부재(不在)를 의미한다. 부재는 홀로코스트 타워의 텅 빈 공간을 상징하며 홀로코스트의 역사를 보여준다.
◇ 유대인의 뼈아픈 역사를 숨기듯, 출입구를 지하에 숨겨
유대인박물관은 소장품보다 건축물로 더 유명하다. 출입구부터 모호한데, 박물관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선 옛 박물관 건물로 들어가야 한다. 지하에 있는 통로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리베스킨트는 일부러 출입구를 지하에 숨겼다. 이는 통독의 도시, 베를린에 유대인의 뼈아픈 역사를 영원토록 숨겨둔다는 의미다.
유대인박물관의 건축 개념인 ‘선들 사이에서(between the lines)’는 일종의 건축 시나리오다. 리베스킨트는 이 시나리오를 두 개의 박물관 건물에 상징적으로 담아 표현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물관 내부의 동선과 공간 구축에도 적용했다. 이 시나리오는 각 3개의 공간 안에 서로 다른 3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첫 번째 공간은 ‘연속의 계단’으로 역사의 연속성을 강조한다. 이 계단을 내려가면 박물관의 전시 공간으로 연결된다. 두 번째 공간은 베를린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유대인들을 추모하는 ‘올리브 정원’을 의미한다. 세 번째 공간은 죽음으로 몰아간 ‘홀로코스트 보이드(Holocaust void)’다.
입구로 들어서니 곧바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왔다. 비좁고 어두운 계단은 벽 틈 사이로 들어온 희미한 빛이 전부였다. 사선으로 기울어진 창과 중첩된 구조물로 된 좁은 계단을 내려가니 좁고 긴 두 개의 복도가 나타났다.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무작정 걷다 보니, 전시장으로 가는 긴 통로와 올리브 정원으로 나가는 통로가 나왔다.
올리브 정원은 유대인박물관 입구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49개의 기둥 사이마다 올리브 나무를 심어 놓았다. 올리브 나무는 희망과 평화를 의미한다. 마지막 49번째 기둥은 이스라엘에서 직접 가져온 흙으로 만들어 깊은 의미를 두었다. 올리브 정원은 베를린에서 추방당했던 유대인들을 기억하기 위해 ‘추방의 정원’ 또는 ‘망명의 정원’이라고도 부른다.
계단을 올라가면 세 번째 공간인 죽음으로 가는 길, ‘홀로코스트 보이드’가 나온다. 바닥에는 이스라엘 작가 메나쉐 카디쉬만의 작품 ‘낙엽(Shalechet)’을 깔아 놓았다. ‘낙엽’은 수없이 희생된 유대인 얼굴을 형상화한 강철 조각들이다. ‘낙엽’을 밟고 지나가자 강철 조각들의 마찰음이 마치 유대인들이 좁고 깊은 공간에서의 처절했던 비명을 떠올리게 했다. 나치에게 학살당했던 유대인들의 죽음을 기억하며 추모하는 장소였다.
◇ 복잡한 내부구조, 유대인 두려움과 공포 실감케 해
복도는 곧게 뻗어 나가다 조각조각 흩어지는 방식으로 구획됐다.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관람객을 위해 안내 직원들이 군데군데 서 방향을 알려주었다. 유대인들이 아무 곳으로도 탈출할 수 없었던 무섭고 두려웠던 그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유대인박물관 디자인의 개념 ‘선들 사이에서’의 의미가 확연히 느껴졌다. 칼로 난도질한 듯 가늘고 긴 불규칙한 창문들은 수용소에서 대량학살된 유대인들의 불안, 공포, 죽음과 겹쳤다.
미로와 같은 좁은 복도를 지나자 소장품 전시실이 나왔다. 유대인박물관의 소장품은 학살된 유대인들의 사진이나 영상물을 비롯해, 그들이 가스실로 끌려갈 때 입었던 피 묻은 옷, 신발 등을 전시했다. 이를 통해 그때의 참상을 기리는 데 의의를 뒀다. 공간 곳곳에서 유대인이 겪은 고통과 공포의 감정 표현에 충실히 하고자 애쓴 유대인 건축가의 정신을 읽을 수 있었다.
◆ ‘미술품보다 미술관을 더 좋아하는’ 사진작가 고영애. 그는 오랫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미술관을 촬영하고 글을 써왔다. ‘내가 사랑한 세계 현대미술관 60(헤이북스)’은 작가 고영애가 15년간 지구 한 바퀴를 돌 듯 북미에서 남미로, 서유럽에서 동유럽으로, 그리고 아시아로 옮겨가면서 12개국 27개 도시에서 찾은 매혹적인 현대미술관 60곳을 기록한 미술관 기행서다. 옛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만든 테이트 모던부터 12개의 돛을 형상화한 최첨단 건축물인 루이비통 파운데이션까지, 책에 게재된 60곳 모두 건축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장소지만, 그중 하이라이트 20곳을 엄선해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