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의 못다 한 그림에의 한(恨)을 풀어주자."
1986년 이중섭 30주기를 맞아 동료들은 그를 기리는 미술상을 제정하기로 했다. 이 취지에 공감한 조선일보가 앞장선 지 3년 만에 열린 첫 시상식에서 이중섭의 친구였던 시인 구상(1919~2004)은 "나는 중섭처럼 그림과 인간, 예술과 그 진실이 일치하는 인간을 이 시대에선 모른다"며 "이 미술상에도 중섭의 저러한 예술과 인품이 계승되길 바라고 믿는다"고 했다.
한국 현대미술계의 가장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인 이중섭미술상이 올해 30회를 맞았다. 5월 4일부터 13일까지 서울 광화문 조선일보미술관에서 열리는 '이중섭미술상 30년의 발자취―역대 수상작가'전(展)에는 1회부터 올해 수상자까지 한국 현대미술 전 세대를 아우르는 작가들의 최신작이 모인다. 한국 미술계에서 묵묵히 작품 활동에 전념해온 작가들을 발굴하는 이중섭미술상의 본뜻을 기리고 10회, 20회 기념 전시에 이어 수상작가들의 지속적인 작품 활동과 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다.
◇그림과 인간이 일치하는 이중섭 정신
초기에는 이중섭을 기린다는 점에서 그와의 작품 연관성을 강조하며 수상자를 선정했다. 첫 수상자 황용엽은 치열한 작가 정신과 인간을 주제로 한 점, 자신과 가까운 가족을 표현 대상으로 삼은 점, 기법에서 재료의 질감과 선을 중시한 점이 높이 평가받았다. 함경도 명천 출신인 김한(7회)은 실향(失鄕)과 고향 바다에 대한 그리움을 주제로 삼았다. 이는 이중섭의 실향과 통영, 제주도 등의 바다 그림과 연관이 있다.
8회 윤석남의 수상은 여러모로 기념비적이었다. 윤석남은 최초의 여성 수상자였을 뿐 아니라 평면 회화가 아닌 설치 작업을 선보이는 작가였다. 이중섭미술상이 성별과 장르를 떠나 모든 작가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선언한 해였다. 이중섭미술상은 그 후에도 정종미(13회), 임송자(16회), 석란희(17회), 홍승혜(19회), 정경연(20회), 오숙환(24회)에게 상을 안기며 여성 작가들을 응원했다.
이중섭미술상은 서양화에서 시작해 설치, 민중미술, 한국화, 조각, 섬유예술 그리고 사진까지 포함하며 한국 미술의 지평을 넓혀나갔다. 19회 때 디지털 매체를 활용한 홍승혜에게 주목한 데 이어 이듬해 섬유를 다룬 정경연에게도 상을 안겼다. 2013년 25회에선 '금기를 파헤치고 비관습적인 시선을 도발적으로 던지는' 작가라며 안창홍을 수상자로 냈다. 레고 조각과 못, 크리스털을 일일이 박은 '디지털산수'로 잘 알려진 황인기를 29회 수상자로 선정한 것에서도 동시대 미술을 적극 수용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동시대 한국 미술의 최전선 보여줘
이번 전시엔 역대 수상자들의 신작 30여 점이 전시된다. 일부 작가는 지난해와 올해 완성한 작품을 내놨다. 작가들 나이와 성별, 장르도 다양해 그간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과 최신 경향을 일별할 수 있다.
25회 수상자 안창홍이 내놓은 '문신한 남자'(2010)는 상의를 벗은 채 문신한 상체와 팔을 드러낸 문신가게 사장을 그린 작품이다. 작가는 "문신한 남자 뒤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뒤집어진 캔버스는 2010년 당시 전 세계적인 흐름인 전통 회화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며 "하지만 회화에 대한 믿음과 평생 한길만 걸어온 회화 화가로서의 신념과 자부심도 그 이면에 담았다"고 했다.
자연이 준 토속적인 정취를 인정받아 18회 수상자로 선정된 민정기는 '삼청동에서 바라본 인왕'(2018)이란 작품을 내놨다. 작가는 "인왕산은 조선 중기 이후 중인 계급들이 뛰어난 경치에 매료돼 시회(詩會) 등의 모임을 가졌다"며 "김홍도·이인문 등 당대 화백의 작품도 이들의 시와 함께 전해지고 있다"고 작품의 배경을 설명했다. 서용선의 최신작 '왕징버스-베이징'(2018)은 대도시에서 대중교통이 갖는 의미를 포착한 작품으로 작가가 10여 년 만에 완성해 선보인다. (02)724-6322, 6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