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제련소에 있던 굴뚝과 벽돌 그대로 살려
환경오염으로 낙후된 이누지마... 미술관이 있는 아름다운 섬으로 부활
바다를 마주한 이누지마 세이렌쇼 미술관은 마치 고대 유적지처럼 나지막한 산에 둘러싸인 채 고고한 모습을 드러냈다. 폐쇄된 구리 제련소를 개조하여 만든 미술관으로, ‘포브스’에 선정된 억만장자이자 자선사업가인 후쿠다케 소이치로에 의해 계획됐다. 알려진 작가들의 유명 컬렉션을 소장하는 미술관이 아니라 섬이라는 특성과 일본 근대화 모습들을 예술로 조화를 이뤄낸 프로젝트로, 일본이 급격한 근대화 과정에서 놓쳤던 생태회복에 경종을 주는 새로운 시도로 평가받았다.
미술관은 대부분 슬래그 벽돌의 내장을 사용했다. 이 미술관의 바닥과 벽에 사용된 1만7000개 이상의 벽돌들은 남아 있는 산업폐기물로 제조된 것이다. 이곳 대부분의 작품 역시 버려진 공장에서 모인 것들로 만들어졌다. 미술관 디자인은 2001년에 캐나다 녹색환경디자인 상을 받았던 히로시 삼부이치 건축사무소가 맡았다.
◇ ‘있는 것을 살려 없는 것을 만든다’ 버려진 산업 폐기물을 미술관으로
이누지마는 1917년에 제련소가 들어서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제련소의 폐쇄로 인한 산업폐기물 투기와 오염 물질로 빚어진 환경 파괴로 다시 낙후됐다. 급기야 한센병 환자의 강제수용소까지 들어서면서 많은 상처와 아픔을 떠안았다. 그 여파로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고 현재 100여 명의 주민만이 섬을 지키고 있다. 그러던 중 2008년 세토우치 국제예술제 일환으로 버려진 제련소를 ‘이누지마 아트 프로젝트’로 만들면서 섬은 서서히 활기를 되찾았다. 섬 전체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만들려는 사고의 전환이 가져온 값진 결과물이다.
미술관은 4개 방으로 구성됐다. 태양 에너지를 이용한 태양 갤러리와 지구 갤러리, 온실효과로 만들어진 열에너지를 수집한 중앙 갤러리, 공기의 순환을 제어하는 굴뚝 갤러리 등이다. 4개의 갤러리 공간은 단순하지만 정교한 상호관계를 이뤘다.
미술관 입구의 컨테이너 안에 있는 태양 갤러리를 관람한 후 다음 전시실로 들어가면 첫 번째 만나는 공간이 긴 복도로 이루어진 지구 갤러리다. 이카루스 이야기를 패러디한 작품 공간이다. 복도의 코너마다 장착해놓은 빛을 쫓아 80m 길이의 지그재그로 된 캄캄한 냉각 복도를 걸었다. 흡사 이카루스를 추락하게 했던 뜨거운 태양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특별한 경험이었다.
중앙 갤러리에는 야나기 유키노리의 작품 ‘영웅 드라이 셀(Hero Dry Cell)’이 놓여 있다.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에게 바쳐진 공간으로 미시마 유키오의 거주 흔적을 작품에 이용했다. 미시마 유키오 생전에 살았던 집의 창문을 공중에 매달아 놓았고 바닥에는 침대를 옮겨 놓았다. 설치 작품 밑에는 물의 정원을 두어 유키오의 거주 흔적을 오마주했다. 굴뚝 갤러리는 유리 컨테이너 안에 전시돼 있었다. 흡사 마르셀 뒤샹의 변기를 패러디한 듯 조그마한 변기와 문을 매달아 놓은 커다란 모빌과 계단, 도르래 등이 설치됐다.
◇ 유명 작품이 아니라 지역적 특성을 예술 작품으로 승화
이누지마 세이렌쇼 미술관의 전체 콘셉트는 일본을 대표한 현대 미술가 야나기 유키노리의 작품을 모티브로 ‘있는 것을 살려 없는 것을 만든다’라는 개념이 주축을 이루었다. 옛 제련소에 있던 굴뚝과 벽돌은 미술관 건축 재료로, 지역적 특성은 예술 작품으로 접목했다.
이누지마 세이렌쇼 미술관은 오래된 목조 민가를 재조명하기 위해 골목길 바로 앞에 투명한 아크릴 작품을 설치해놓았다. S-아트 하우스의 작품 ‘콘택트 렌즈’는 렌즈를 통해 이누지마의 가옥과 정원, 낡고 복잡한 전신주 등 옛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투명 아크릴 벽에는 크기와 초점이 다른 수많은 원형 렌즈를 부착해놓았고, 긴 아크릴 벽 사이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통로도 내어놓았다. 주변 나무와 집들, 걸어 다니는 사람들 등 촌락의 풍경이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비쳤다.
안과 밖이 들여다보이는 투명한 유리 소재의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었던 A-아트 하우스의 작품 ‘리플렉토’는 세지마 가즈요의 건축팀이 디자인을 맡았고 내부 작품은 고진 하루카의 설치작업이다. 원형의 투명 아크릴로 세워진 이 설치미술은 조화로 만든 화려한 컬러의 꽃잎들을 아크릴 벽에 부착하여 상하 대칭을 이루고 있었다. 내부로 들어가면 밖의 풍경들이 작품 속으로 비추어져 화려한 컬러의 꽃들은 조금 생경하다. 그러나 그 집 안에 잠시 머물면 화려한 컬러들은 어느새 이누지마의 하늘과 산, 오랜 민가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듯 조용한 빈집에 생기를 찾아주었다.
세지마 가즈요의 작품 나카노타니 가제보는 휴게소다. 원형 지붕의 아담한 휴게소는 하늘과 주변 풍경을 그대로 끌어들여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쉼터였다. 세지마 가즈요가 디자인한 토끼 의자에 앉아서 소리를 지르니 천정의 울림을 통해 메아리처럼 되돌아왔다. 아사이 유스케의 설치 작품은 고무 소재를 지면에 녹여 동물과 식물, 배 등 섬과 자연을 표현했고 같은 기법을 사용해 만든 작은 기둥들을 세워놓아 흡사 오랜 유적지를 연상케 했다.
◆’미술품보다 미술관을 더 좋아하는' 사진작가 고영애. 그는 오랫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미술관을 촬영하고 글을 써왔다. ‘내가 사랑한 세계 현대미술관 60(헤이북스)’은 작가 고영애가 15년간 지구 한 바퀴를 돌 듯 북미에서 남미로, 서유럽에서 동유럽으로, 그리고 아시아로 옮겨가면서 12개국 27개 도시에서 찾은 매혹적인 현대미술관 60곳을 기록한 미술관 기행서다. 옛 화력발전소를 개조해 만든 테이트 모던부터 12개의 돛을 형상화한 최첨단 건축물인 루이비통 파운데이션까지, 책에 게재된 60곳 모두 건축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장소지만, 그중 하이라이트 20곳을 엄선해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