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희원 기자

서울 대학로에 있는 아르코미술관 화장실에 들어서면 세면대에 그리스 조각상〈사진〉이 있다. 여자 화장실에 있는 것은 흰색 대리석이나 석고로 만든 것 같은 비너스의 두상이다. 누군가 두고간 기념품일까 미술관의 화장실을 치장하려는 장식품일까. 둘 다 아니라 손을 씻을 때 사용하는 비누다.

20년간 비누 조각을 해온 신미경 작가의 '화장실 프로젝트'다. 미술관 안에서는 작가가 비누로 만든 신작과 미발표작을 선보이는 개인전 '사라지고도 존재하는'이 한창인데, 화장실에선 그의 작품이 비누로 쓰이고 있다. 전시 기간 동안 사람들 손에 비누가 닳고 나면 이 또한 '작품'으로서 다른 전시에 선보일 예정이다. 현재 화장실에 있는 비누 조각은 아직 미완성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물 묻은 손으로 조각상을 문지르기가 미안하다. 닳을까봐, 녹을까봐 조심스럽다. 하지만 조금 닳은 모습을 본 뒤에는 태연하게 비너스의 코나 머리를 매만진다. '감히 작품에 손을 댄다'는 은밀한 쾌감 때문인지 오히려 더 세게, 더 오래 문지르기도 한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비누에 낙서를 하거나 비누 조각의 일부를 떼가려는 시도도 있다. 닳고 녹고, 긁히면서 비너스의 얼굴은 일그러진다. 이 비누 조각은 유럽의 유물을 흉내 낸 것일 뿐 유물이 아니었지만, 전시가 끝날 무렵에는 미술관 화장실의 시간을 품은 유물이 된다. 작품의 일부가 사라지고서야 작품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시간에 풍화되다가 사라지는 우리의 일생과 그리 다르지 않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가 문득 서글퍼진다. 9월 9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