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엄살 피우지 말고 더 빨리 뛰어." "걱정 마, 형한테는 절대 안 질 거야!"

전국이 폭염으로 몸살을 앓던 지난달 31일, 태극마크를 단 젊은이들이 강원도 태백 함백산 중턱을 달리고 있었다. 3주째 체력 훈련이 한창인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남자 복싱 국가대표였다. 이들의 목적지는 해발 1330m에 있는 태백선수촌. 약 12㎞ 오르막길을 1시간 이내에 주파한 국가대표 임현철(23)·현석(23) 형제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내쉬었다. 땀으로 흠뻑 젖은 두 사람의 얼굴은 마치 데칼코마니를 펼쳐놓은 듯 똑같았다.

‘쌍둥이 복서’임현철(왼쪽)·현석 형제는 다가오는 아시안게임에서 똑같은 목표를 세웠다. 시상대 맨 위에 서서 애국가를 듣는 것이다. 둘은“우리가 복싱 팬들에게 애국가를 두 번 들려드리도록 이 악물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형제가 지난달 31일 태백선수촌 트랙 위에서 달리는 모습.

형제는 1995년 5월 12일, 1분 간격으로 태어난 '일란성 쌍둥이' 복서다. 처음 이들을 마주하는 순간 잠시 당황할 수밖에 없다. 누가 형인지 동생인지 좀처럼 구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제가 사각 링 위에만 서면 "저 선수가 형(동생)이네"라고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형은 상대 공격을 피하고 정확히 꽂아 넣는 오른손 공격이 일품인 인파이터(infighter), 동생은 왼손 강펀치를 주무기로 삼는 사우스포(왼손잡이) 아웃복서(out boxer)다.

복싱에 먼저 발을 들인 건 1분 먼저 태어난 형이었다. 운동 신경이 남달랐던 임현철은 대전동산중 1학년 때 체육선생님 권유로 글러브를 끼었다. 이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던 동생 현석이 일주일 뒤 자연스럽게 형을 따라 복싱 체육관을 찾았다.

어렸을 때부터 쌍둥이라는 이유로 똑같은 옷을 입었던 형제는 링에서만큼은 각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싶었다고 한다. "누가 인파이터 해볼래?"라는 선생님 말에 형이 먼저 대답했고, "누가 체급 낮춰볼래?"란 질문엔 동생이 번쩍 손을 들었다.

서로 지기 싫어하는 성격 탓에 고등학교 졸업 이후부터 지금까지 스파링을 함께 해본 적 없다. 형은 "내 얼굴 때리는 것 같아 못하겠더라"며 "복싱 스타일은 다르지만 1분 먼저 태어난 내가 동생보다 당연히 실력이 좀 낫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던 동생이 "형이 팔굽혀펴기를 60개 하면 난 기어코 65개를 했다. 우리는 인생 라이벌인 셈"이라고 맞받아쳤다.

친구처럼 티격태격 다투다가도, 대회를 앞두고선 '철석(현철+현석) 콤비'로 변신한다. 형제가 체급이 다르고, 복싱 스타일도 달라 경기 전 상대 선수 분석에 서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부모님 뒷바라지도 두 아들에겐 큰 힘이 됐다. 대전에서 칼국수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부모님은 "가문의 영광"이라며 보양식을 만들어 주곤 한다. 그래도 형제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아버지표' 김치찌개다. 아버지 임낙준(57)씨는 아들들 경기에 거의 빠짐없이 응원을 하지만, 어머니 김현주(55)씨는 수년째 경기장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스포츠라고 해도 아들 둘 맞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서'이다.

'철석 콤비'의 왼쪽 팔목엔 똑같이 오륜기가 그려져 있다. 국가대표로 선발된 지난 3월 "아시안게임을 발판 삼아 2020도쿄올림픽에서도 일 한번 내보자"는 의미로 새겼다고 한다.

형 현철은 이미 아시안게임 메달리스트다. 지난 2014 인천아시안게임 라이트웰터급(64㎏)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생 현석은 당시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2012 런던올림픽 은메달리스트 한순철에게 밀렸다가 이번에 대표로 뽑혀 형제가 처음으로 메이저 국제대회에 동반 출전하게 됐다. 형 현철은 웰터급(69㎏), 동생 현석은 라이트웰터급에 출전한다. 둘은 지난달 태국오픈국제복싱대회에서 각각 금, 동메달을 따면서 아시안게임 메달 전망을 밝혔다.

"우리 형제가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복싱 팬들에게 애국가를 두 번 들려드리도록 이 악물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형 임현철이 당당하게 출사표를 던지자, 이심전심(以心傳心)인 듯 현석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