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4월 어머니가 소천하셨다. 야속하다 싶을 만큼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평생 우리 모자 관계가 평탄치 않았던 탓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유별난 분이었다. 서울여상 재학 시절에는 교복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처럼 허리를 잘록하게 고쳐 입으셨고 몰래 영화관에 갔다가 담임선생님과 마주쳤던 모험담을 일인 다역을 넘나드는 연기력으로 들려주시기도 했다. 끼와 개성을 자랑하던 어머니 삶이 반전을 맞은 것은 나와 동생을 두고 월북하신 아버지가 전쟁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이후였다.
갑자기 닥친 풍파 앞에서 어머니는 너무도 유약한 분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내가 가족 생계를 책임져야 했지만, 단지 그래서 어머니에 대해 애증이 생긴 것은 아니었다. 모성 결핍이라고 해야 할 만큼 당신 감정만 앞세우시던 어머니에 대한 아쉬움은 평생 섭섭함으로 이어졌다.
장례식 내내 평정심을 유지했던 내가 눈물을 쏟은 것은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면서였다. 어머니 지갑 속에는 지갑만큼이나 오래된 내 사진이 한 장 들어 있었다. 조실부모한 당신도 어머니 사랑이란 걸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 역할을 해내야 했고 종종 강요받으면서 무척이나 버거웠을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는 그저 당신만의 서툰 방식으로 동생과 나를 사랑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못난 노년의 아들과 소녀 같았던 노모의 이별은 그렇게 허망함과 따스함을 오가는 묘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그렇게 미련했던 나의 앙금을 거두어 가셨다.
피곤의 회복이 예전 같지 않게 느껴져도 나이듦의 서글픔보다는 70년 넘게 버텨준 내 몸이 고맙기도 하고 지금에 충실하면 된다는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요양 병원에 계시던 어머니를 뵈러 갈 때마다 내가 그곳에 누워있는 상상을 하곤 했다. 나는 백 살에 도전할 만큼 장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본 적도 없다. 죽음은 불행이 아니고 삶의 일부분임을, 그리고 반듯하게 찍힌 삶의 마침표는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의 관계를 연결해 주는 쉼표가 된다는 사실을, 어머니와의 이별을 겪으면서 알게 된 지금은 더 그렇다.
나 떠나는 날에는 하늘이 열린 듯 청량한 소낙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소나기 그치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걸릴 때쯤 먼저 가 있는 어머니와 딸아이들의 엄마를 벅차게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