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햇볕정책 전도사에서 비판가로 자신의 북한관을 수정한 보기 드문 학자다. 그는 “북한이 핵보유국이 된 지금도 대화로 문제 해결이 가능하다고 믿는 전문가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라며 “북한 내부의 민주화를 유도해 궁극적 비핵화를 끌어내는 게 유일하게 가능한 길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정치엔 인력(引力)과 척력(斥力)이 모두 작용한다. 척력이 대부분의 평범한 시민들을 정치 혐오자로 만들고 밀어내는 와중에 정치에 한번 끌린 이들은 마력(魔力)에 가까운 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김근식(53) 교수는 후자다.

그는 '햇볕정책의 적손'이란 말까지 들을 정도로 열렬한 지지자이자 이론가였다. 2007년 2차 남북 정상회담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 특별수행원을 지낸 북한 전문가다. 자연스럽게 2009년 민주당 공천을 받으며 정계에 입문했다. 여기까진 정치판의 수많은 '폴리페서(정치 참여 교수)' 중 하나인가 싶지만, 그 후의 김 교수는 좀 특별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건 전향과 실패의 기록이다. 정치판에 머무는 동안 김 교수는 햇볕정책 전도사에서 비판가로 돌아섰다. 달라진 대북관과 함께 당적도 민주당에서 국민의당, 바른미래당까지 진보에서 중도로 바뀌었다. 그사이 2009년 재보궐선거부터 2016년 총선, 지난 6월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진 재보궐선거까지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정치 입문 10년 차, 금배지는 달지 못했지만 이젠 교수 대신 정치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꽤 생겼다. 지난 7일 서울 삼청동 연구실에서 마주 앉은 김 교수에게 지난 10년, 즉 정치판에서의 전향과 실패에 관해 물었다.

―교수 출신들이 정치하면 선거 운동 나가자마자 '멘붕(멘털 붕괴)'이 온다던데.

"선거 운동 나가 보면 인사를 받아주긴커녕 명함을 주면 그 자리에서 던져버리는 사람도 많다. 거기서 멘붕이 온다. 자괴감 드는 게 당연하다. 선거 패배 후유증도 심각하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정치판에선 선거에서 지고 나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사람이 꽤 있단 얘기도 많다."

―정치한다고 했을 때 가족 반대도 심했을 것 같은데 어떻게 극복했나?

"처음 나갈 땐 전략 공천이고 갑자기 결정된 거라서, 집에 상의했다기보단 통보였다(웃음). 아내가 쿨한 사람이라서 '당신 하고 싶은 건 하되 나를 끌어들이려 하지 마라'는 주의다. 나 역시 정치인 아내들이 반드시 내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정치인들이 결국 돈 문제에 발목을 잡히더라. 돈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나.

"예전엔 부정선거 하고 비공식적으로 여기저기 돈을 뿌려야 해서 돈이 많이 들었지만 이젠 많이 투명해졌다. 다만 이런 건 생각해볼 문제다. 아직도 사람들은 정치인과 밥 먹으면 돈은 다 정치인이 낸다고 생각한다. 정치라는 게 결국 사람 만나는 직업인데, 그러다 보면 하루 밥값만 10만원 넘게 드는 날이 많다. 물론 후원금이 있지만, 상한선도 있고 제약이 많다. 정치자금 문제는 투명하게 집행하되 현실에 맞게 손질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정치에 뛰어든 교수들을 가리키는 '폴리페서'가 멸칭으로 통용되는 경우도 많다.

"폴리페서라는 말 자체가 나쁜 건 아니라고 본다. 권력을 좇고 입신양명하려고 본인의 학문적 견해까지 바꾸는 교수들이 문제지, 본인의 전문성과 정치적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 교수들까지 싸잡아 비판할 건 아니다. 욕 먹는 폴리페서들은 보통 기관장 한자리하려고 정치판 기웃거리는 이들인데 그런 사람들보단 몇 번씩 떨어진 내가 낫다고 생각한다."

―2016년에 비례대표 10번을 공천받았는데 순위가 낮다고 던진 것도 그렇고, 지난 6월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노원병에 나가려 했다가 당내 분란 끝에 물러선 것도 그렇고 정치적 기로에서 판단 미스가 있었단 지적도 있다.

"2016년 국면에서 비례대표 던진 건 생각이 부족했고 지난 보궐선거에서 양보한 것도 진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때그때 나름의 판단이 옳다는 확신이 있었다. 지난 보궐선거에선 이준석과 말싸움에 시달리며 당과 안철수 대표에게 부담을 주기보단 과감히 포기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런 판단이 쌓여서 김근식이란 정치인이 만들어지는 것이고 대중이 나를 올곧은 정치인이라고 인정해준다면 언젠가는 승리할 것이라고 본다."

―진보에서 보수로 대북관을 바꾼 거의 유일한 북한학자라는 평가도 있다. 전향의 이유가 있다면?

"이렇게 요약하겠다. 나는 현실이 바뀌면 견해를 바꾸지, 견해에 맞춰 현실을 바꾸진 않는다. 10년 사이 북한은 핵개발 국가에서 핵보유국이 됐다. 햇볕정책을 펴던 때와는 게임 자체가 달라졌는데 같은 정책을 고수하는 건 고장 난 레코드판을 계속 돌리려는 것이다."

―2012년부터 안철수 대표의 대북 정책 자문에 응하면서 정치적 운명을 함께하고 있다. 어떤 부분에서 뜻이 맞은 건가?

"둘 다 중도주의를 추구한다. 안 대표에게도 얘기한 적 있는데 중도란 무조건 찬성이나 반대에 기운 양극단을 배제하고 문제 해결에 합리적으로 접근하는 사고방식이자, 자신과 다르다고 비난하거나 증오하는 게 아니라 소통하고 품위를 유지하는 정치적 태도다."

―하지만 안 대표와 중도주의도 지난 대선과 이전 지방선거 패배로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한 것 아니냐.

"우리가 진보와 보수 양극단을 비판하는 건 곧잘 했는데, 우리가 추구하는 중도가 무엇인지를 전달하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앞으로 1~2년 안에 사람들이 중도주의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국민에게 선택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선택받을 때까지 정치를 할 생각인가?

"2020년 총선까지는 정치를 해도 된다는 아내의 허락을 득(得)했다(웃음). 아직 한 번도 선택을 받아본 적 없으니 한 번은 받아봐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