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믿어라. 설령 그것이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의미일지라도"
깊은 눈매의 남성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흑백 사진 속 문구다. 남성의 얼굴 아래쪽에는 미국 스포츠용품업체 나이키의 로고와 ‘저스트 두 잇(Just do it)’이란 슬로건이 박혀있다. 이 남성은 ‘시팅맨(sitting man)’으로 불리는 전(前) 미국 프로풋볼(NFL) 선수 콜린 캐퍼닉(31)이다.
NFL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49ers)의 쿼터백이었던 캐퍼닉은 2016년 8월 그린베이 패커스와의 경기에 앞서 진행된 국가 제창 때 기립을 거부하고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었다. 인종차별에 항의한 퍼포먼스였다. 캐퍼닉은 "흑인과 유색인종을 탄압하는 나라의 국기에 존경을 표하기 위해 일어설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경찰의 공권력 과잉 사용으로 흑인이 숨진 사건이 잇따라 발생해 논란이 일고 있었다. 캐퍼닉을 지지한 다른 선수들도 무릎 꿇기에 동참했다. NFL을 비롯해 미국 프로농구, 축구 등 미 스포츠계에 ‘시팅맨 따라하기’ 열풍이 번졌다.
그러나 캐퍼닉의 퍼포먼스를 달갑지 않게 여긴 이들도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릎 꿇기 퍼포먼스에 참여한 NFL 선수들에게 ‘개XX(Son of a bitch)’ 등 용설을 쓰며 비난을 퍼부었고, 일부 선수의 퇴출과 NFL 경기 보이콧을 주장했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무릎을 꿇었던 캐퍼닉은 2017년 팀에서 방출된 이후 어떤 프로팀에도 차출되지 못했다. 그러나 캐퍼닉은 최근 다시 한번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달 3일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 캐퍼닉의 얼굴이 도배됐다. 나이키가 ‘저스트 두 잇’ 캠페인 30주년을 기념한 새 광고 모델로 캐퍼닉을 발탁한 것이다.
◇ ‘사생아’ 출신 소년, 만능 스포츠맨으로
캐퍼닉은 1987년 미 위스콘신주(州) 밀워키에서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캐퍼닉의 어머니는 그를 낳을 당시 19세에 불과했고, 아버지는 캐퍼닉이 태어나기도 전 그들을 떠났다. 결국 캐퍼닉은 심장병으로 두 아이를 잃은 백인 가정의 막내 아들로 입양돼 자라게 된다.
캐퍼닉은 8살 유소년팀에서 풋볼을 시작했다. 9살부터는 팀에서 쿼터백을 맡았다. 풋볼 쿼터백은 상대 진영으로의 공격을 지휘하는 포지션이다. 그는 고교 내신 평균 성적이 4.0에 달할 정도로 학업 능력도 뛰어났지만, ‘만능 스포츠맨’으로 더 유명했다. 캐퍼닉은 캘리포니아주 털록의 존 피트먼 고등학교 재학 당시 풋볼, 농구, 야구에서 모두 주 대표로 선발됐다.
사실 캐퍼닉은 풋볼보다 야구 투수로 더 인정받았다. 캐퍼닉은 고교 선수 시절 이미 시속 92마일로 공을 던진 선수였다. 그는 출전한 대부분의 대회에서 상을 휩쓸었고, 야구 장학금도 여럿 받았다. 그러나 캐퍼닉은 풋볼 선수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풋볼계에선 캐퍼닉에 별 관심이 없었다. 캐퍼닉은 고교 야구 선수 때 키 196.0㎝(6피트5인치)에 몸무게 77㎏인 마른 체형을 갖고 있었다. 이에 풋볼 관계자들은 캐퍼닉이 거친 몸싸움을 벌여야 하는 풋볼 선수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때 캐퍼닉에게 기회를 준 건 한 곳 뿐이었다. 네바다대학이 캐퍼닉에게 풋볼 장학금을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결국 캐퍼닉은 2006년 네바다대학 풋볼팀에 입단했다. 그러나 캐퍼닉에게 야구는 뗄 수 없는 스포츠였다. 2009년 프로야구팀인 시카고컵스가 캐퍼닉에 투수직을 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풋볼 선수로서 열망이 더 컸던 캐퍼닉은 시카고컵스와 계약을 포기했다.
캐퍼닉은 대학 풋볼에서 입지를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2008년과 2009년 미국 대학 풋볼리그 중 하나인 WAC에서 ‘올해의 공격수’로 꼽혔으며, WAC를 대표하는 ALL-WAC 팀의 쿼터백 선수로 연이어 차출됐다. 캐퍼닉은 미국대학스포츠(NCAA) 역사상 최초로 1만 패싱야드(공을 패스하면서 전진한 구간)와 4000 러싱야드(공을 들고 전진한 구간)를 기록한 선수가 됐다.
대학 졸업 이후 캐퍼닉은 2011년 NFL 드래프트 2차전에서 샌프란시스코 포티나이너스(49ers)에 입단했다. 캐퍼닉은 2년 차인 2013년 뇌진탕으로 부진했던 알렉스 스미스를 대신해 주전 쿼터백 자리에 올랐다. 캐퍼닉이 주전 선수로 출전한 첫 시즌(2013년), 포티나이너스는 캐퍼닉의 활약으로 1994년 이후 처음으로 챔피언 결승전인 ‘슈퍼볼’까지 진출했다. 그러나 이후 캐퍼닉은 별 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어깨 부상까지 겹친 그는 슬럼프에 빠졌고, 포티나이너스는 3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 ‘시팅맨’ 캐퍼닉…"인종차별 항의가 풋볼보다 중요"
캐퍼닉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한 건 그의 퍼포먼스 때문이었다. 캐퍼닉은 2016년 8월 26일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 경기장에서 열린 그린베이 패커스와 시범경기에 앞서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었다. 통상 국가가 연주될 때 선수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손을 얹고 국민의례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캐퍼닉은 국가가 끝날 때까지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캐퍼닉은 인종차별에 항의한 뜻으로 기립을 거부했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에서는 백인 경찰의 과잉 무력진압으로 흑인이 사망하는 일이 잇따르고 있었다. 캐퍼닉은 이날 NFL미디어와 인터뷰에서 "거리에 시신들이 넘치는데 그들(백인 경찰)은 살인을 저지르고 휴가를 떠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흑인이나 유색인종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나라의 국기에 존경을 표하기 위해서는 일어서지 않겠다"며 "이것은 나에게 풋볼보다 중요한 일이며, 이를 외면하는 건 이기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캐퍼닉은 ‘무릎꿇기’ 퍼포먼스 이전부터 인종차별에 항의해왔다. 그는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에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라는 인종차별주의 반대 운동을 지지한다는 밝혔다.
아울러 캐퍼닉은 2016년 경기 때도 국가 제창 당시 기립하지 않고 벤치를 지켰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가 무릎을 꿇은 건 전직 풋볼 선수이자 미군 출신인 네이트 보이어의 충고 때문이었다. 보이어는 캐퍼닉에게 그를 지지하지만, 그냥 앉아있는 것은 무례한 태도로 비춰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캐퍼닉은 국가에 관한 존중을 버리지 않았다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한쪽 무릎을 꿇었고, 그는 ‘시팅맨(sitting man)’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캐퍼닉의 퍼포먼스는 큰 화제가 됐다. 그를 지지한 팀원을 비롯한 일부 NFL 선수들은 ‘무릎꿇기’ 퍼포먼스에 동참했다. 이후엔 프로농구(NBA), 프로야구(MLB) 등 다른 스포츠계에도 캐퍼닉의 퍼포먼스를 따르는 선수들이 생겨났다.
◇ 캐퍼닉 둘러싼 찬반 논란…트럼프, 욕설 쓰며 맹비난
이후 미국에서는 캐퍼닉의 퍼포먼스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거세졌다. 미 언론과 SNS 상에서는 스포츠에서 정치적 의사표현을 허용할 수 있는 정도, ‘표현의 자유’와 ‘애국심’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 등에 관한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당시 캐퍼닉의 유니폼 상의 판매량은 팀내 20위에서 1위로 올랐고, 전체 NFL 선수 중 3위를 차지했다. 미 머큐리뉴스에 따르면, 대부분이 캐퍼닉을 지지하는 의미로 유니폼을 구입했지만, 일부는 캐퍼닉의 유니폼을 불태운 것으로 전해졌다.
캐퍼닉의 소속팀인 포티나이너스는 "종교와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관점에서 선수들은 국가 연주 때 일어날 지 여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는 입장을 밝히며 그를 두둔했다. 유명 흑인 가수 스티비 원더는 캐퍼닉을 지지하는 의미로 자신의 공연 무대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캐퍼닉의 행동은 민주주의가 작동한 방식이며, 그는 헌법의 기본권을 행사했다"고 옹호하기도 했다.
캐퍼닉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 이들도 있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캐퍼닉을 맹비난했다. 그는 캐퍼닉이 퍼포먼스를 한 직후 시애틀의 한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캐퍼닉의 퍼포먼스는) 끔찍하다"며 "그(캐퍼닉)는 자신에게 더 잘 맞는 나라를 찾아 떠나야 하지만, 그런 나라는 없을 것"이라고 일갈했다. 캐퍼닉은 2016년 미 ESPN과 인터뷰에서 살해 협박을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미 CNN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9월 한 연설에서 NFL 선수들이 국민의례를 거부한 것과 관련, "NFL 구단주가 국가와 국기에 존경을 표하지 않는 선수에게 ‘지금 당장 저런 개XX를 경기장에서 쫓아내라, 그는 해고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은가"라고 말해 NFL 관계자와 선수들을 비롯한 스포츠계의 거센 반발을 맞았다.
그러나 캐퍼닉은 굴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갔다. 그는 경찰에 항의한 의미에서 경찰 모자를 쓴 돼지 그림이 그려진 양말을 신어 주목을 받았다. 캐퍼닉은 또 인종차별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관련 단체에 매달 10만달러씩 10개월 동안 총 100만달러를 기부하기로 약속하고, 이를 실행하고 있다. 미국의 유명 팝가수 알리샤 키스, 제이 콜 등 유명인들이 그의 기부에 동참했다.
◇ ‘퇴물’ 캐퍼닉, 나이키 새 얼굴로 돌아와
캐퍼닉은 지난해 미 타임지가 발표한 ‘올해의 인물’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아울러 국제 인권 단체인 국제앰네스티는 올해 초 캐퍼닉에게 ‘양심대사상’을 수여했다. 양심대사상은 생업에서 인권 향상에 앞장 선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그러나 캐퍼닉은 지난해 3월 팀과 계약이 만료돼 퇴출된 후 1년 넘게 새 둥지를 찾지 못하고 있다. 스포츠계에서는 그가 정치적 문제와 관련한 ‘괘씸죄’ 때문에 팀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그렇게 캐퍼닉은 한물 간 퇴물선수로 잊혀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최근 나이키의 새 얼굴로 돌아와 다시 한번 논란의 중심에 섰다. 나이키는 올해로 30주년을 맞은 ‘저스트 두 잇’ 캠페인을 기념하는 광고 모델로 캐퍼닉을 발탁했다. 나이키는 이달 3일 "캐퍼닉은 스포츠의 영향력을 이용해 세계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한, 근래 가장 영감을 준 인물"이라고 밝혔다. 캐퍼닉 지지자들은 그에게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은 즉각 나이키를 비난하고 나섰다. 트럼프 대통령은 4일 미 온라인 매체 데일리 콜러와 인터뷰에서 "(나이키가 캐퍼닉을 모델로 쓴 것은) 끔찍한 메시지"라며 "나이키가 이런 끔찍한 메시지를 보낸 목적이 있겠지만,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런 끔찍한 메시지는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 그럴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강조했다.
아울러 트럼프 지지자들과 캐퍼닉 반대자들은 나이키 불매 운동을 벌이고 있다. 나이키 제품을 불태우거나 훼손한 영상과 사진을 SNS에 올리는 이들도 있었다. 캐퍼닉의 ‘저항’이 나이키와 미 보수진영의 대결로 번진 것이다.
미 월스트리트저널은 4일 이번 광고가 공개된 뒤 온라인에서 나이키에 관한 부정적인 의견이 많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전했다.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54%가 캐퍼닉을 모델로 기용한 것이 부적절하다고 답했다. 아울러 나이키에 관한 긍정적인 평가는 광고가 공개된 지 하루 만에 50%에서 40%로 하락한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일각에서는 나이키의 승리를 전망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나이키는 이번 광고로 SNS에서 최소 4300만달러(약 480억원)의 광고효과를 얻은 것으로 전해졌다. 글로벌 컨설팅업체인 비발디파트너스의 에릭 요하임스탈러 최고경영자(CEO)는 로이터에 "이런 방향이 나이키에 딱 맞는 것"이라며 "나이키는 도전적이고 반항적인 태도를 대변해 브랜드 이미지를 강화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