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순 '담연' 한복 디자이너 "예복을 평복으로 입으려니 문제 생겨"
"한복은 '이벤트 옷' 아닌 '입는' 옷… 어린 시절부터 '경험치' 높여야"
"전통 혼례, 성인식, 파티 등 자연스레 한복 즐기는 일상 행사 많아져야"
"한복을 정중하게 다뤄주면 좋겠어요."
흰 저고리에 남색 치마, 단아한 한복 차림의 이혜순(58) 한복 디자이너는 기자를 만나자마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답답하게 하는 건 전통이 훼손된 채 무분별하게 착용되는 고궁 앞 퓨전한복이다.
이혜순은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왕의 남자’ ‘쌍화점’ 등의 영화 의상을 제작하고, 2010년 G20 정상회의에서 한복 패션쇼를 연 이름난 한복 디자이너다. 2011년에는 한복을 입고 신라호텔 뷔페레스토랑에 갔다가 출입을 거부당해 전통문화를 홀대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고발하기도 했다. 이 사건 후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은 직접 청담동 담연을 찾아가 사과했다. 그는 "요즘 사람들은 신라호텔 사건을 몰라요. 여전히 한복은 홀대받고 있지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 한복 감별이 문제 아니야… 제대로 한복 아는 사람 없어
이혜순은 먼저 종로구청의 한복 감별 논란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종로구청은 지난 11일 고궁 근처에서 체험용으로 입는 퓨전한복의 궁궐 무료입장을 제한한다고 밝혔다. 당시 토론회에 참석했던 그는 자신이 느낀 소감을 솔직하게 밝혔다.
"나눠준 브로슈어를 보니 대님 치는 법 틀렸어요. 이를 지적했더니 문화재청의 도움을 받았다 하더라고요." 답답한 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주최 측 누구도 한복을 제대로 입는 사람이 없었다. "진행 요원들이 허술한 한복을 입었는데, 치마 안엔 속치마를 받쳐 입지 않아 검은 바지가 훤히 드러났죠. 그런 옷을 입고 전통을 운운하니 앞뒤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한복 디자이너로서는 이런 제재가 반갑지 않을까? "한복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구분할 건가요? 먹고 사는 일이 걸린 대여 업자들의 생존은 누가 책임지고요? 한복 같은 전통은 눈앞의 결과만을 위해 무리하게 움직여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교육을 강조했다. 일단 한복을 잘 알아야 제대로 된 한복을 유통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 불편한 한복? 일단 입어보고 탓하라
그는 30년 가까이 한복을 입고 생활하고 있다. 단지 한복 디자이너여서가 아니라, 한복이 편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일할 때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도 무리가 없단다. "불편하다"는 말엔 "일단 제대로 갖춰 입어보시라"고 반박한다. "입어보지도 않고 한복을 불편하다고 해요. 한복은 한반도에서 5000년 동안 입어온 옷이에요. 제대로 입으면 이보다 편한 옷이 없죠. 게다가 한복은 아름답고 우아해 보이는 효과도 있습니다."
그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양팔을 360도로 크게 돌렸다. "보세요. 팔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죠? 서양 옷은 진동(겨드랑이) 둘레가 좁기 때문에 이런 동작을 하기 어렵죠." 평면 패턴을 기반으로 한 한복은 여유롭고 활동이 자유롭다. 한복에도 입체 패턴이 적용된 적이 있는데, 고려 시대 임부복을 보면 배 쪽에 다트(Dart·몸에 맞추기 위해 솔기를 접은 것)를 잡은 흔적이 있다. "한복은 몸에 대한 배려를 기반으로 한 옷"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한복이 지닌 숨은 미학도 흥미롭다. 짧은 저고리와 긴 주름치마로 구성된 한복이 단조로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저고리의 면 구분 덕분이다. 목둘레에 깃과 동정을 달고, 앞선에 고름을 달아 부피감을 줬다. 또 저고리를 입으면 목에서 겨드랑이까지 자연스럽게 팔(八)자 모양의 주름이 잡히는데, 이는 한복을 더 입체적이고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그런데도 한복이 불편하다고 생각되는 이유 무엇일까? "혼례복과 같은 한복만 접하기 때문이에요. 예복을 평상시에 입으려니 어려운 옷이 되는 거죠." 그가 제안하는 일상복은 조선 시대 평민 복을 변형한 한복이다.
"선조들은 이 옷을 입고 농사를 짓고, 산에 올라 나무를 벴어요. 일상복으로 입는 한복은 기존 한복보다 치마 폭이 좁고, 저고리는 길며, 치마 길이와 소매 길이가 짧습니다. 브래지어를 따로 착용하지도 않습니다. 색을 잘 배열하면 커트 머리에도 어울리죠. 온종일 사무실에서 컴퓨터 작업을 한다고요? 한복 한 번 입어보세요."
한복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비싸다"는 평이다. 한복은 장인들이 제작하는 맞춤옷이다. 일반 한복집에서는 40~50만원, 고급 한복집에서는 200만원 안팎에 판매되는데, 상·하의는 물론 속옷과 신발, 액세서리까지 포함한다. 공정을 생각하면 합당한 가격이지만, 금액만 보고 대부분 비싸다고 한다. 심지어 결혼식 때 빌려 입는 웨딩드레스의 대여료보다 가격이 더 싼 데 말이다.
"2015년 샤넬이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한복을 활용한 패션쇼를 열었을 때, 샤넬 스텝들이 우리 한복집을 다녀갔어요. 한복을 보고 감탄하던 친구들이 가격을 듣고 깜짝 놀라더군요. 유럽의 오트쿠띄르(haute couture·고급 맞춤복)와 다름없는데, 정말 이 가격이 맞냐는 거죠.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 "한복은 ‘입는’ 옷이다" 어린 시절부터 ‘경험치’ 높여야
이혜순을 만난 날,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뉴스에는 평양 시민들이 색색의 한복을 입고 문재인 대통령을 환대하는 모습이 나왔다. 북한의 한복이 어떠냐는 질문에 그는 "부럽다"고 했다. "북한 한복이 촌스럽고 이상하다고들 하는데, 저는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전된 형태라고 봅니다. 오히려 여기서 입는 한복은 많이 변형됐죠."
이혜순이 우려하는 것은 한복이 우리 일상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것.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지나가면 사진 찍는 소리가 났어요. 하지만 지금은 사진을 찍지 않아요. 한복에 대한 관심이 사라진 거죠. 얼마 전에는 공연을 보러 갔는데,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저더러 ‘깜짝이야. 유관순인 줄 알았네’라고 해요. 얼마나 교육이 안 됐으면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요?
이혜순은 한복이 맥을 이어가기 위해선 ‘경험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예법과 소재 같은 걸 강조할 필요 없이, 일단 입어야 합니다. 한복이 ‘입는 옷’이지 (전시용) 한복인가요?"
경험치는 어릴 적부터 키워야 한다. 그는 걸그룹 2ne1의 멤버 CL 가족의 일화를 들려줬다. "몇 년 전 그의 외할머니가 성년이 되는 손녀를 위해 한복을 지어주고 싶다고 찾아왔어요. 옷감을 고르고 치수를 재고, 가봉해 한복을 만들어 줬죠. 이후 CL이 자신의 뮤직비디오에 한국적인 요소를 넣고 싶다며 은가락지를 가져가 끼고 나왔어요. 이렇게 어른들이 경험치를 만들어 주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전통을 찾게 됩니다."
◇ 신(新)한복? 변형 한복에 심취한 사이 전통 단절될 것
이혜순은 전통혼례 전도사를 자처한다. 한복 입는 문화를 되살려야 한다는 절박함에서다. 그는 서구화되어 가는 혼례 문화를 지적했다. "전통 한복이 지금껏 명맥을 이어 온 건 결혼식 폐백 문화 덕분이었는데, 혼례가 간소화되고 폐백도 생략되면서 한복을 입을 기회가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손님들에게 종종 전통혼례를 열자고 제안합니다. 전통혼례를 하면 혼주와 가족뿐 아니라, 참석자들도 한복에 관심을 갖게 될 테니까요."
체험 한복과 개량 한복이 확산되는 지금의 현실도 우려스럽다. 누군가는 한복을 친근하게 접하다 보면 전통을 보는 눈도 생길 것이라고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처음부터 전통에서 멀어지다 보면 전통을 맛볼 기회가 단절될 수도 있어요. 변형 한복에 심취한 사이, 전통 한복은 몰락될 겁니다. 한복이 사라진 후 나중에 전통을 찾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요?"
이혜순은 한복의 대중화와 현대화를 논하기 전에 전통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은 열악하다. 학창시절 한복과 전통문화를 접할 시간도 없고, 전문적으로 한복 기술을 가르치는 대학 교육기관도 없다. 그나마 하나 남았던 배화여대 전통복식과도 2년 전 폐과됐다. "함께 한복을 만들 젊은이가 없어요. 장래성이 없어 보이니, 공부하려는 사람도 없죠. 학생들에게 어드밴티지를 주고, 기술자를 제대로 대우해 줘야지요. 언제까지 정신 교육만으로 한복의 명맥이 이어지길 바라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