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실종된 사우디아라비아 반정부 언론인 자말 카쇼기는 사우디를 떠난 뒤 미국 등을 떠돌다 이스탄불을 마지막 피란처로 삼아 지내오다 변을 당했다. 카쇼기뿐 아니다. 이스탄불은 아랍 각국의 반정부 인사들의 '망명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고 중동 전문지 미들이스트아이(MEE)가 14일(현지 시각) 보도했다.
지난 수년 사이 이슬람권에서는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IS(이슬람 국가) 사태' '카타르 단교' 등 대형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터키만큼은 이에 크게 휘말리지 않고 관련국들과 두루 원만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슬람 망명자들에겐 상대적으로 안전한 피란처인 셈이다.
MEE에 따르면 현재 이스탄불엔 타리끄 알하시미 전 이라크 부대통령 등 아랍 각국의 반정부 인사 수백 명이 머무르고 있다. 이들 대부분 내전이나 대규모 민중 봉기 등 급격한 정권 교체기에 '앙시앵레짐(구체제)' 인사라는 이유로 낙인찍혀 조국을 떠났다. 이슬람 수니파인 알하시미 전 부통령은 2012년 시아파 정권이 자신에 대해 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을 선고하려 하자 피신해 이스탄불로 왔다.
이집트 대통령 선거 후보였던 아이만 누르 전 의원은 선거에서 패한 후 레바논을 거쳐 2015년부터 이스탄불에 머물고 있다. 그는 현재 '알샤르크TV'를 운영하며 이집트 정부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2011년 노벨평화상 공동 수상자인 타와콜 카르만도 이스탄불을 무대로 활동하고 있다. 2015년 사우디의 예멘 전쟁 개입으로 현지 치안 상황이 악화하자 이스탄불로 피란 온 것이다. 카르만은 이곳에서 아랍 인권 운동가들과 연대해 아랍 각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스탄불 시내 '무크타르'란 이름의 카페는 '리틀 시리아'라고 불릴 정도로 시리아 난민들로 항상 붐빈다고 한다.
이스탄불이 아랍 망명가의 '피란처'가 된 데는 현 터키 정부의 균형 외교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터키는 이집트·사우디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아랍 국가와 원만한 관계를 맺고 있다. 아랍인들이 터키 비자를 비교적 수월하게 받을 수 있다. 5년을 체류하거나 2만5000달러(약 3000만원)만 내면 영주권도 받을 수 있다. 거기에 이스탄불은 이슬람권 문화 도시인 데다 유럽 수준의 생활환경을 갖추고 있다. 또 도시 인구가 1500만명에 달하고,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살고 있어 망명가들이 신분을 숨기기에 용이하다.
이스탄불은 한때 북아프리카부터 중동까지 이르는 이슬람 제국을 이뤘다가 20세기 초 패망한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다. 오스만 제국의 영광을 상징했던 도시여서 많은 아랍인의 향수를 자극하는 곳이라는 점도 작용한다. 하지만 이번 카쇼기 사건으로 이제 이스탄불도 안전한 곳은 아니라는 인식이 망명가 사이에서 퍼지고 있다고 이코노미스트는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