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년이 휘청대며 달린다. 뻣뻣한 외투를 펄럭이며, 한쪽 팔을 아무렇게나 흔드는 그의 얼굴에 핏기가 없다. 무척 추운 모양이다. 한겨울이라도 흰 눈이 덮여 있으면 포근해 뵈련만, 울타리 아래 그늘진 구석에 얼어붙은 눈이 조금 남은 앤드루 와이어스(Andrew Wyeth·1917~2009)의 풍경에서는 뼛속까지 시린 한기(寒氣)가 느껴진다.
20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화가, 와이어스는 안료를 계란 노른자에 섞어 바르는 오래된 수법인 템페라를 사용해서 바싹 마른 잔디와 차고 딱딱한 흙의 질감을 정교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소년을 그림 밖으로 쏟아내듯 일렁이는 언덕과 비좁은 하늘, 가위로 오려낸 것처럼 날카로운 그림자, 창백한 겨울 햇빛은 현실적이지 않고 오히려 기괴하다. 이처럼 치밀하게 그린 세부에 비해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딘지 모르게 낯설고 불길한 와이어스의 풍경을 두고 평론가들은 '마술적 사실주의'라고 불렀다.
화가는 '보물섬'과 '로빈슨 크루소' 등 고전 명작의 삽화를 도맡았던 유명 미술가인 N. C. 와이어스의 다섯 자녀 중 막내다. 앤드루는 병약한 체질 탓에 학교 대신 집에서 아버지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나고 자란 펜실베이니아의 시골 마을을 벗어난 적이 별로 없지만, 예술과 문학과 대화가 충만했던 가정에서 부족할 것이 없이 자랐다.
1945년, 그를 감싸 안은 거대한 언덕 같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겨울’은 그 뒤로 처음 그린 그림이다. 그림 속의 언덕 뒤에 바로 아버지가 목숨을 잃은 철길이 있다. 말보다 그림을 먼저 익혔던 화가지만 그때까지 아버지의 얼굴을 그리지 않은 게 천추(千秋)의 한(恨)이 됐다. 허우적대듯 언덕을 헤매는 소년이 화가의 자화상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