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안병현

인류가 달에 역사적인 첫걸음을 디딘 게 50년 전 일이다. 달은 그 순간 신비를 잃어버렸다. 인공지능(AI)이 세계 바둑 최강자를 꺾었고 에이즈에 걸리지 않도록 유전자를 교정한 아기도 태어났다. 과학이 인간의 능력을 무한히 확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초월적 존재를 숭배하던 습관을 잃어버렸다. 그래도 신년 인사에는 기복 신앙이 남아 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미신이나 점을 믿지 않아도 이런 인사를 주고받는다. 종교도 없고 자신 말고는 아무것도 섬기지 않지만 복을 더 받으라고 덕담한다. 2019년은 기해년(己亥年). 60년 만에 황금 돼지가 돌아왔단다. '기'는 흙의 기운을 담은 노란색, '해'는 돼지를 뜻한다. 황금 돼지 덕에 형편이 좀 나아지려나. 복이 많다는 속설 때문에 결혼과 출산 시장엔 훈풍이 불 조짐이다.

한국인은 무슨 띠가 많고 무슨 띠가 적을까. '아무튼, 주말'이 1958년 개띠부터 2017년 닭띠까지 60년치를 살폈다. 통계청은 1970년부터 출생아를 집계하기 시작해 이전 자료는 비공식 추정치를 합산했다. 돼지띠가 378만9770명으로 가장 많았다. 개띠(378만5901명), 쥐띠(357만6691명) 순으로 나타났다. 끝에서 1~3위는 말띠(328만5812명), 닭띠, 뱀띠였다. 돼지띠가 100명이라면 말띠는 87명인 비대칭이다.

선호하는 띠, 기피하는 띠가 있다

‘황금돼지해’를 맞아 순금으로 만든 돼지들이 선물로 많이 팔린다.

올해 출산이 예정된 정모(32)씨는 몇 달 전 황금 돼지띠 한정판 태교 일기 세트를 샀다. '내 안의 황금 돼지'라는 제목으로 임신 다이어리를 비롯해 초음파 사진 보관용 비닐과 스티커, 아빠 일기장 등이 들어 있다. 정씨는 "돼지띠라서 무조건 낳고 싶었다. 태명을 '꿀복이'로 지었다"고 했다. 다른 예비 엄마들에게도 '꿀떡이' '꿀꿀이' '꿀덩이' '꽃돼지' '꿀돼지' '복덩이' '황금이' '금동이'가 자라고 있다.

결혼과 출산이 시들해지는 추세 속에 2007년 정해년 붉은 돼지 해는 특별했다. 출생아(49만6822명)가 주변 해들보다 3만~6만명쯤 더 많았다. 혼인도 34만4000여 건으로 2004~2017년 중 최고점을 찍었다. 정부가 장려금을 줘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던 출생률과 결혼율이 복이 들어온다니까 벌떡 일어선 것이다. 집단 무의식은 이렇게 힘이 세다. 어차피 할 출산과 결혼이라면 좀 미루거나 당겨 돼지해에 해야 길하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2010년 백호랑이해, 2012년 흑룡해에도 아기 울음소리가 반짝 상승했다.

언제부터인가 띠 동물 앞에 색깔이 붙는다. 10개의 천간 중 '갑·을'은 청색, '병·정'은 적색, '무·기'는 황색, '경·신'은 백색, '임·계'는 흑색이다. 2018년 무술년은 황금 개띠, 2014년 갑오년은 청말띠로 부르는 식이다. 역술인을 중심으로 저출산이 고민인 정부, 불황을 떨치려는 기업이 이심전심 퍼뜨렸다는 의혹도 있다. 황금돼지 시장의 번창에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한 셈이다.

주민등록인구 중 나이별로 으뜸도 1971년생 돼지띠다. 행정안전통계연보에 따르면 2017년 말 기준으로 1971년 신해년에 태어난 사람이 94만4179명으로 가장 많았다. 2위는 1968년생 원숭이띠, 3위는 1969년생 닭띠로 조사됐다.

황금돼지해가 출산과 결혼, 소비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김종대 중앙대 교수는 "속신(俗信·민간신앙)의 전승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판단이 축적되면서 우리 삶에 일정하게 영향을 끼친 것이다. 예컨대 나쁜 액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더 조심하게 되고 불행을 막을 수도 있다."

중국에서는 용띠를 선호하고 양띠를 꺼린다. 한국과 일본에서 기피 1순위는 말띠다. 일본에서는 1965년에 182만명, 1966년 136만명, 1967년엔 194만명이 태어났다. 1966년(병오년 말띠)에 50만~60만명 덜 태어나며 출산율 그래프가 도끼로 찍어낸 듯 움푹 들어간 모양새다. '열두 동물 중 힘이 가장 센 말띠 여성은 팔자가 사납다'는 속설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1978년 말띠 해에 출산율이 뚝 떨어졌고 1990년 말띠 해엔 출생 성비(여아 100명당 남아 숫자)가 116.5로 치솟았다.

우리 국민 중 말띠가 가장 적은 까닭은 이 미신과 무관하지 않다. 21세기에도 유효할까. 김두규 우석대 교수는 "사주도 사회변화와 성평등에 따라 해석이 달라진다"며 "과거에는 여성이 조신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요즘엔 팔자가 센 여성이 사회활동을 더 잘한다"고 했다.

'미신 경제학', 왜 거대한가

서울 경복궁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행복한 돼지' 특별전이 한창이다. 돼지는 열두 띠 동물 가운데 가장 끝에 있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했다. 봉건시대부터 궁핍을 해결해줄 신호로 돼지를 떠올렸다. 굿판이나 고사상에서 볼 수 있듯이 신이 즐겁게 받는 제물이기도 했다.

우리는 숱한 미신에 둘러싸여 있다. 오늘의 운세, 결혼(궁합), 출산, 이사, 작명, 묏자리, 실내장식….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무시하자니 찜찜하다. 돼지꿈을 꾸면 복권 가게로 직행한다. 1월 1일부터 홈쇼핑 채널들은 황금돼지 골드바를 내걸고 "2019 부자 돼지요~"라며 호객을 시작했다. 백화점들도 '황금돼지 경품행사'를 열고 있다. 조폐공사는 황금돼지 메달을 출시했다.

이 황금돼지해는 2012년에 태어난 흑룡띠 아이들의 초등학교 입학과 겹쳐 있다. 키즈업계는 '텐 포켓(10개의 주머니)'이라 불리는 매출 증가를 기대한다. 아이 한 명을 위해 부모는 물론 양가의 조부모와 이모, 고모, 삼촌 등이 지갑을 연다는 뜻이다. 신생아는 줄고 있지만 '골드 키즈'를 향한 '텐 포켓' 현상이 강화되면서 그 시장은 2002년 8조원 규모에서 근년 들어 40조원대로 급성장했다(KT경제경영연구소).

'미신 경제학'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신 관련 산업은 어마어마하다. 납세의 의무가 없어 덩치를 가늠하기 어렵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초 "한국의 점술 시장은 사주·타로·운세를 포함해 연간 37억달러(약 4조원) 규모에 이르고 역술인은 30만명, 무당은 15만명이 넘는다"고 보도했다. 외모를 고치면 팔자도 바뀐다는 믿음 때문인지 성형수술 업계와 얽혀 있는 사례도 많았다.

우리는 왜 종종 미신에 휩쓸릴까. 정재승 KAIST 교수는 자신의 책 '열두 발자국'에서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라며 야구를 예로 들었다. 타자·투수·야수 중 징크스가 가장 많은 건 타자, 가장 적은 건 야수다. "포지션에 따라 성공 확률이 다르기 때문이다. 타자는 3할(10번 중 3번 성공)을 치기 어렵고 야수는 한 경기에서 실책을 한 번 할까 말까다. 실패할 확률이 높을수록 더 많은 징크스를 만든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 집단이 공유하는 마음의 버릇

1959년 기해년생들이 환갑을 맞는다. 그들에게 오늘은 가난한 시절에 꿈꾸던 미래였다.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가 됐지만 공동체는 무너졌고 개인은 작아졌다. 삶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우연으로 가득하다. 김두규 교수는 "우리가 아는 지식은 합리적인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지만 실제 삶에서는 불안하고 막연한 경우가 많다"며 "황금돼지나 사주나 곧이곧대로 믿을 게 아니라 희망과 위로를 주는 장치"라고 했다.

김난도 서울대 교수가 펴낸 '트렌드 코리아 2019'의 부제는 '모두에게 돼지꿈을(piggy dream)!'이다. 그는 "한 집단이 공유하는 '마음의 버릇'은 소비에 큰 역할을 한다"며 "좋은 해라고 서로서로 덕담을 나누고, 결혼을 서둘러 하고, 돼지 해에 애를 낳고, 이사를 하고 사업을 일으키면 결과적으로 경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신년 덕담을 완료형으로 표현했다. 숙종(1661~1720)은 고모의 오랜 병이 완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숙병이 쾌차했다 하니 기쁘다"고 편지에 썼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조선시대 신년 덕담은 바라는 바를 확정된 사실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상대방을 존중하는 표현에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같은 명령형은 쓰지 않았다"고 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가 언제부터 널리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1920년생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어릴 적에도 새해에 어딜 가나 그런 덕담을 들었다"고 말했다. 열화당 이기웅(79) 대표는 "황금돼지띠니 흑룡띠니 하는 표현은 근년 들어 생긴 상술"이라고 했다.

한국에서 '행복'이라는 낱말은 133년밖에 안 된 발명품이다. 1886년 '한성주보'에 처음 등장했다. 영어 'happiness'의 본뜻은 '행운'이었는데 일본에서 영국의 공리주의(功利主義)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번역하며 '행(幸)'과 '복(福)'을 합쳐 '행복'이 태어났다. 철학자 탁석산은 "(신과의 연결이 끊어지면서) 행복이 신을 대체하며 일종의 세속 종교가 되었다. 행복하고자 하는 마음과 실제로 행복하지 않은 현실 사이의 괴리가 크다"고 진단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는 강요 같아서 스트레스를 유발할 수 있다. 살짝 바꿔보는 건 어떨까. "새해 행운을 빕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