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낮인데도 행인 한 사람 찾아보기 힘든 시골 마을이었다. 수원 시내에서 차를 타고 50분 정도 가면 닿는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수리. 이곳이 100년 전 3·1운동 당시 격렬한 항쟁이 벌어진 지역이라고는 좀처럼 짐작이 가지 않았다. 화수초등학교 정문에 있는 독립운동기념비만이 그때 흘린 피를 증언해주고 있었다. 당시 주민들이 공격한 일제의 주재소 자리로 추정되는 곳이다.
마을 하나가 불타 없어진 학살의 현장이었다. "28명이 살해당한 인근 제암리보다 더 큰 규모의 피살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국의 3·1 만세운동 중에서도 유례 드문 공세적 항쟁이 일어났던 지역인데도 세상엔 좀처럼 알려지지 않았죠." 동행한 박환 수원대 사학과 교수가 설명했다.
피해는 참혹했다. 사건 직후 화수리를 방문한 캐나다 선교사 프랭크 스코필드는 '40채가 넘는 가구 중에서 18~19채만 남고 나머지는 불타 폐허가 됐다'고 기록했다. 1919년 4월 4일 새벽, 집이 타는 소리와 연기 냄새에 놀라 뛰쳐나온 주민들은 일본 군대의 방화로 마을 전체가 화염에 휩싸인 모습을 목격했다.
일본군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 병력은 주민에게 무차별 발포하고 몽둥이로 구타했다. 온몸에 72군데나 난도질당한 사람도 있었다. 주민들은 아기를 등에 업거나 어린아이의 손을 부여잡고 황망히 산으로 몸을 피했다. 붙잡힌 사람들은 감옥으로 끌려갔고, 이웃 마을로 달아난 이들은 문간에서 잠자리를 구하고 굶주려야 했다.
일제의 이 만행은 독립운동 진영에도 충격을 가져왔다. 독립신문 1920년 3월 1일 자는 천으로 덮인 형제의 시신 앞에서 울고 있는 두 화수리 어린이의 사진과 함께 희생자를 애도하는 주요한의 시 '대한의 누이야 아우야'를 실었다. '화수리 우거진 풀밭이 무도(無道)의 불에 재만 남을 때, 죄 없는 너의 두 다리가 야만한 왜병의 거친 손 밑에….'
화수리 항쟁의 배경에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이 있었다. 면사무소는 지세·호세부터 도장세(屠場稅)·연초세에 이르는 온갖 세금을 주민에게 부과했고, 모포 만드는 일과 송충이 잡는 일에 수시로 동원했다. 바다에 접한 입지 조건도 한몫했다. 일제는 이 지역에 대대적인 간척 사업을 벌여 주민과 인부들에게 과중한 노동을 강요했고, 일본인 감독들은 술만 마시면 부녀자에게 행패를 부렸다. 이 일대가 독립운동 조직이 와해되지 않고 세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항쟁이 거세게 일어났다는 시각(이정은 대한민국역사문화원장)도 있다.
1919년 4월 3일 우정면과 장안면 일대 주민 2500여 명은 만세 시위 거사에 나섰다. 주도자는 백낙열(천도교), 김교철(기독교), 차병한(유교) 등 여러 종교를 망라했다. 박환 교수는 "당시 우정·장안면이 2400여 호 규모였으니 한 집당 한 명꼴로 전 주민이 항쟁에 참여했던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했으며 총을 쏘는 일본인 순사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를 처단했다. 25세 새파란 나이에 주민의 뺨을 때리고 위생검사로 모욕을 주는 등 조선인을 학대하던 순사였다. 주재소가 전소된 뒤 주민들은 해산했지만 이튿날 새벽 일본 군대의 잔학한 보복을 맞게 된다.
당시 화수리에서 가장 컸던 기와집이 전소됐다는 얘기가 여러 기록에 나온다. 현재 화수리 이장인 송진석(62)씨는 "그곳은 화수리 787, 788번지로 비닐하우스와 폐방앗간이 있다"며 "근처 땅을 파면 기와가 많이 나오곤 했는데, 어렸을 땐 거기에 귀신이 산다는 소문에 겁을 먹고 가지 않았다"고 했다. 김종구 화수초등학교 교장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화수리 이야기를 하면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놀란다"며 "학생들이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최근 화성시는 화수초 옆 옛 보건소 건물을 '방문자센터'로 만드는 공사를 시작했는데 오는 삼일절 이전 완공할 계획이다. 화성시청 최현순 독립기념사업팀장은 "그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화수리 3·1운동을 알리고자 당시 주민들이 만세를 외쳤던 길을 역사 탐방로로 만드는 '만세길 조성 사업'의 일환"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