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바라본 경복궁과 청와대. 흉지라는 설에 시달렸다.

"한 마리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온 동네 개들이 따라 짖는다(一犬吠形 百犬吠聲·일견폐형 백견폐성)"는 말이 있다. 이달 초 유홍준 '광화문 시대' 위원이 대통령 집무실 이전 보류를 발표하면서 말미에 "풍수상 청와대가 불길하기에 장기적으로 옮겨야 한다"고 하였다. 언론과 술사들이 이 발언을 확대 재생산하였다. 그때 기자들이 불길하다는 근거를 물었으나, 유 위원은 답하지 않았다. 왠지 저주성 예언 같아 불안하다.

1718년 강릉 촌로 함일해가 숙종에게 '장희빈 무덤이 흉지이니 옮겨야 한다'는 글을 올린다. 당시 풍수 관료들이 즉각 반박했다. "터가 나쁘다고 작정하면 그 근거를 댈 풍수서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좋다고 하면 그 근거를 댈 풍수서 또한 충분합니다."('장희빈 상장등록') 청와대 터도 이와 같다. '청와대 터 흉지설'은 근거 없는 음모론이다.

1101년 윤관 장군 등은 현재의 터(청와대·경복궁)가 도읍지로 적합하다고 숙종에게 보고한다. 청와대의 역사적 출발이다. 1393년 이성계는 이곳을 조선의 왕궁으로 정한다. 결정적 역할을 한 풍수 관료가 이양달이었다. 고려와 조선 두 왕조에 걸쳐 활동한 당대 최고의 술사였다. 그 공로로 80세가 되던 1432년 세종으로부터 1품 벼슬을 받는다. 그때도 반대 의견들이 있었다. 크게 세 가지였다. 북악산이 돌산으로 험악하고, 청와대·경복궁 좌우로 흐르는 물이 부족하고, 북서쪽(현 자하문 쪽)이 골이 졌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이양달은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하였다(토목·건축·조경 기술이 발달한 지금 이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다).

그런데 1433년 풍수 관리 최양선이 장문의 상소를 통해 '경복궁 터가 흉하며 승문원 터(현재 현대건설사옥과 운현궁)가 좋다'는 주장을 펼친다. 세종은 풍수 관리와 대신들이 이를 논의케 한다. 또 직접 북악산에 올라가 그 진위를 살핀 뒤 경복궁 터가 길지라는 결론을 내린다. 아울러 최양선을 향해 "미친놈으로 결코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1464년 나이 80이 된 최양선이 다시금 '경복궁이 흉하다'는 글을 세조에게 올린다. 후배 풍수 관료 최연원이 이를 완벽하게 논박한다. 세조도 그를 "천하의 미친놈(天下之妄人)"이라고 하였다. 벌은 주지 않고 옷 한 벌을 내린다.

1616년 광해군은 임진·정유 양란 등 국가 불행이 경복궁 터 때문이라는 이유로 교하천도를 시도한다. 풍수 관리 이의신이 그 총대를 멘다. 그것은 터의 문제가 아니었다. 서자 출신으로 소수 지지 세력으로 임금이 된 광해군이 기득권 세력의 근거지인 한양을 버리고 새롭게 판을 짜고자 하는 음모였다. 실패하였다.

1865년 흥선대원군은 이곳에 궁궐을 중창한다. 그는 풍수에 능하여 아버지 묘를 '2대 천자가 나온다'는 예산으로 이장한 주인공이다. 1910년 조선을 멸망시킨 뒤 일제는 이곳을 총독부(경복궁)와 관저(청와대 터)로 활용한다. 터가 나빴으면 활용했을까? 그런데 1993년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청와대 터는 신들의 거처로서 흉지"라고 주장한다. '조선총독과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을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1945년 이후 대한민국은 이곳에 대통령궁을 두면서 세계 최빈국에서 인구 5000만 이상 국가로서 1인당 3만달러 국민소득으로 따지면 세계 5위의 부국이 되었다"(정영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최근에는 한류 덕분에 문화의 세계 중심국이다. 이곳이 길지라는 근거는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찾을 수 있다. '세종실록'과 '세조실록'에 방대한 분량의 관련 논쟁이 수록되어 있다. 청와대 터는 억울하다. 권력을 남용한 사람들의 잘못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