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김지은 진술의 일관성
②권력상 상하관계 "위력 작용했다"
③피해자 입장서 본 '성인지 감수성'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1일 ‘비서 성폭행’ 혐의로 항소심에서 징역 3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뒤 구치소로 향하는 법무부 호송차에 타고 있다.

수행비서 성폭행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56) 전 충남지사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이 항소심에서 뒤집혔다. 결정적 이유는 재판부가 "피해자 김지은씨의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일한 직접 증거인 김씨의 진술을 폭넓게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이를 깨뜨릴 수 있는 안 전 지사의 진술에는 일관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또 안 전 지사와 김씨 사이에 위력이 있었고, 범행 과정에서 작용했다고 봤다.

서울고법 형사12부(재판장 홍동기)는 이를 근거로 안 전 지사에게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①"불리한 진술도 일관된 김지은, 믿을만하다"
1심을 맡은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는 안 전 지사의 혐의 10개를 모두 무죄로 판단했다. 핵심 증거인 김씨의 진술을 놓고는 "믿기가 어렵다"고 했다. 안 전 지사의 범행을 전후로 한 김씨 태도와 평소 성격 등을 보면 증언과 진술을 믿기 어려운 정황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면 항소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의 혐의 10개 가운데 9개를 ‘김씨 진술의 신빙성’에 따라 유죄로 인정했다. "사건 당시의 상황이나 세부적 내용, 안 전 지사의 행동이나 반응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직접 경험하지 않고 진술하기 어려운 내용을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김씨가 피해사실을 뒤늦게 폭로한 데 대해서도 "충분히 그럴만하다. 피해 사실을 허위로 지어냈다거나 무고 이유를 증명할 자료가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이어 "김씨의 진술에 비합리적이고 모순되는 부분이 없다"며 "김씨가 자신에게 다소 불리한 부분도 솔직하게 진술했고, 자신이 대응한 방법도 과장해 진술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씨가 검찰 수사 때부터 항소심까지 ‘일관되게 진술한 것’도 이런 판단의 근거가 됐다. 김씨의 진술이 사실관계와 일부 맞지 않은 경우에도 재판부는 "그 자체로 신빙성을 배척할 사정이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반면 안 전 지사 진술은 모두 배척됐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는 김씨와 성관계를 맺은 경위에 대한 진술을 계속 번복하고 있다"며 "안 전 지사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했다.

무죄로 인정된 혐의는 "2017년 8월 중순 안 전 지사가 충남도청 집무실에서 김씨를 추행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에 대해 "추행 시기나 장소 뿐만 아니라 추행 방법과 내용 등에 관한 진술이 구체적이거나 일관됐다고 보기 부족하다"며 "김씨 스스로도 특정이 어렵다는 취지로 진술했다"고 했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비서 성폭행’ 혐의에 대해 항소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은 뒤 여성단체 회원이 ‘축 유죄’가 적힌 손피켓을 들고 있다.

②"두 사람 사이 위력 존재했고, 작용했다"
'위력'에 대한 판단도 1심과 항소심이 일부 달랐다. 1심은 "안 전 지사가 사회적 영향력이 강한 유력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은 넉넉히 인정된다"며 위력이 존재한다고 봤다. 다만 안 전 지사와 김씨 사이에 '위력에 의한 성관계'는 없었다고 봤다. 개별 사안에서 안 전 지사가 위력적 분위기를 만들었거나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항소심에서는 "합의에 의한 성관계였다"는 안 전 지사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런 관계가 '권력형 상하관계'에 따른 것이라고 봤다. 위력이 존재했고, 작용했다는 것이다. 대법원 판례는 위력에 대해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힘'이라고 규정하는데, 사회적 지위나 권세도 포함된다.

재판부는 "안 전 지사는 김씨가 적극적으로 저항하기 어렵고 취약한 상태인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며 "지위와 권세가 김씨의 자유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무형적 위·세력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안 전 지사는 김씨가 별정직 공무원이라는 신분적 특징과 내부 사정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취약한 처지를 이용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점도 지적했다. 일부 범행에서 안 전 지사가 김씨를 안거나 옷을 벗긴 부분은 적극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라고도 했다.

재판부는 "김씨가 안 전 지사에게 이성적 관심이 있거나 흠모했다는 감정을 인정할 만한 아무런 자료가 없다"며 "안 전 지사도 김씨가 이성적 감정을 갖고 정상적인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인식할 만한 점이 충분히 인정된다"고 했다. 안 전 지사가 김씨에게 지속적으로 "미안하다"고 한 점도 김씨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는 판단의 근거가 됐다.

③주체적 여성으로 볼 것이냐, 피해자의 입장으로 볼 것이냐
'성인지(性認知) 감수성'을 고려한 대목에서도, 1심과 2심은 차이가 컸다.
1심 판결은 이랬다. "여성은 독자적인 인격체로서 자기 책임 아래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음이 당연하고, 이러한 여성의 능력 자체를 부인하는 해석은 오히려 여성의 존엄과 가치에 반하고, 나아가 여성의 성적 주체성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부당한 결과를 가져온다고 할 것이다." 즉 '여성=위력자의 성관계 요구를 부리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여성의 존엄성을 부인하는 행위라고 봤다.

1심 재판부는 그러면서 "이 사건은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갖춘 성인 남녀 사이에 발생한 사건이고, 피해자의 저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곤란하게 하는 물리적인 위력이 직접 행사되었다고 볼만한 구체적 증거는 제출되지 않은 사안"이라고 전제했다. 이어 "피해자가 원치 않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당한 것인지 여부는 결국 피해자의 진술에 더해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평소 및 범행 전후의 언행과 태도, 범행에 이르게 된 경위와 전후 사정 등 제반 간접사실을 종합해 판단할 수 밖에 없다"며 "그 판단에 이르는 증거 평가를 함에 있어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한 성인지 감수성적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2심은 ‘성인지 감수성’을 더 적극적으로 고려했다. 즉, 피해자가 위력을 뿌리치지 못하고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 이를 뒤집을 만한 결정적 증거가 없을 경우 피해자의 입장에서 그 주장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은 이런 기준으로, 김씨가 수행비서로서의 업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을 ‘피해자답지 않다’고 보는 것도 문제가 있다고 했다. 김씨가 안 전 지사에게 이모티콘을 사용하며 친근감을 표시한 것이나, 성폭행을 당한 후 안 전 지사가 좋아하는 식당을 찾아보는 행위가 사회적 지위가 낮은 ‘피해 여성’의 입장에서 가능한 행동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성범죄 이후)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격이나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밖에 없다"며 "특정 반응만을 정상적 태도라 보는 주장은 편협한 관점에 기반한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