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3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금남로. 시민과 학생들이 도청앞 광장을 차지하고 시민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가운데 시민들이 걸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플래카드가 눈에 띄고 있다.
얼마전 자유한국당 의원 3인이 국회에서 5.18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한 발언을 두고, 무소속 서청원 의원이 "조선일보 기자로서 9박 10일간 취재했던 5·18 현장은 금은방 한 곳, 도청 문서 하나 훼손된 것 없는 숭고한 민주화 운동이었다"며 이들의 "북한군 개입설" 발언을 비판했다.
당시 조선일보 취재진으로 사회부 서청원, 조광흠, 사진부 이영배 기자 등이 파견되어 10여일간 광주에서 일어난 현장에 기록된 사진들이다. 모두 사진부 故이영배 기자가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들 가운데 눈에 띄는 건 시민들이 붓글씨로 써서 건 것으로 보이는 "북괴는 오판말라"는 플래카드이다. 민주화의 열기로 어지러운 상황에서도 광주 시민들은 분명한 주적에 대해 경고했다.
서청원 의원의 젊은 기자 시절 모습도 보인다.
1980년 5월 광주 사진/ 이영배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 운동 첫날 많은 시민 학생들이 금남로에 모여들고 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금남로, 힉생과 시민들이 진압군에 붙잡혀 팬티바람에 끌려가고 있다.
1980년 5월 19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시 금남로에서 시위 도중 붙잡힌 시민과 학생들을 군인들이 구타하고있다.
1980년 5월 20일 광주민주화운동 사흘째날의 긴장감 도는 금남로. 진압군과 학생 시민들이 도로를 가득메우고 대치하고 있다.
1980년 5월 20일 광주민주화운동 사흘째날,긴장감이 도는 금남로.에서 진압군인들과 학생, 시민들이 도로를 가득메우고 대치하고 있다.
1980년 5월 20일 광주민주화운동 사흘째날,긴장감이 도는 금남로에서 학생, 시민들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군인들과 대치하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에 의해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물러나고 시민과 학생들이 치안유지에 나섰다. 안녕 질서를 위해 시민수습대책 위원회는 가두방송을 나섰다. 1980년 5월 24일
많은 사상자를 낸 광주민주화운동에 의해 계엄군은 시 외곽으로 물러났다. 전남도청앞 광장의 분수대 주변에 희생자들의 시신이 널려있고 시민과 학생들이 그 곁에 모여 민주화 의지를 다짐하고 있다. 1980년 5월 23일.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학생들이 경찰복장 차림으로 시내 치안질서 유지를 위해 순찰하고 있다. 1980년 5월 25일
1980년 5월 24일 전남도 청사 복도에서 한 대학생이 카빈 소총을 들고 의자에 앉아 주변 경계를 서고 있다.
1980년 5월 24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도청 주변의 경비를 서고 있는 학생들.경찰의 방석모와 방석조끼를 입고 칼빈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서 젊은 학생들이 두손을 포박당한 채 계엄군에 연행되고 있다. 1980년 5월 27일
광주민주화운동 중 다시 금남로에 진주한 계엄군이 시위에 적극 가담한 것으로 보이는 젊은이 들을 세워놓고 포박을 하고 있다 1980년 5월 27일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물러나 있던 계엄군이 1980년 5월 27일 새벽 시민군 본부로 사용하고 있는 전남도청 건물 진입하며 다시 시내를 장악했다. 광주시 상무관에 희생자 시신들이 안치되어 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취재하고 있는 본사 취재팀. 가운데 아래가 당시 사회부기자였던 서청원 의원. 80년 5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