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되는 미·북 협상은 갈수록 한국과 일본이 핵무기 개발에 나설 명분과 동기(incentives)를 주고 있다. 동아시아의 잠재적 안보 상황은 전혀 평화롭지 않다. 안타깝지만 매우 위태롭다."
오바마 행정부의 대북 정책인 '전략적 인내'를 설계·주도한 커트 캠벨〈사진〉 전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는 14일 본지 인터뷰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협상을 벌이고 있지만 그가 진심으로 핵을 포기할 의도가 있느냐에 대해선 비관적(pessimistic)"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미국이 '재앙'으로 여기는 동아시아의 '핵개발 도미노' 가능성을 정부 고위직을 지낸 인사가 직설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례적이다.
그는 "김정은에게 핵과 미사일은 체제 유지의 핵심 버팀목으로, 포기하기 매우 어려운 것"이라며 "겉으로 드러난 그의 말만 믿고 '평화가 오고 있다'고 판단하고 대응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핵 협상은 서둘러서는 안 되고 무엇보다 신중하게, 체계적으로(systemically) 차근차근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서울 고등교육재단에서 열린 최종현학술원 콘퍼런스에 참석차 방한했다.
캠벨 전 차관보는 미·북 비핵화 협상에 대해 "꼭 해야 할 홈워크(숙제)도 하지 않고 부실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미국과 북한 모두 협상을 너무 서둘러 하고 있다"며 "이렇게 부실하게 하면 지금 하는 노력은 그저 '나쁜 노력'밖에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이달 말로 잡힌 2차 미·북 정상회담에 대해 "너무 빨리(too early) 하는 것 같다"고 했다. 충분한 실무협상을 통해 주요 의제를 조율하기도 전에 회담 날짜부터 잡았다는 것이다. 그는 "오바마 정부 때도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놓고, 몰래 핵·미사일 능력을 계속 키웠다"며 "이번 협상도 과거의 실패를 반복해선 안 될 것"이라고 했다.
로버트 갈루치 전 미 국무부 북핵 특사도 이번 북핵 협상에 대한 우려를 드러냈다. 1차 북핵 위기를 봉합한 1994년 미·북 제네바 합의의 주역인 그는 이날 본지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은 회담이 끝난 뒤 마이크 앞에서 우리가 '엄청난(great)' 평화적 진전을 이뤄냈다고 크게 발표하길 똑같이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비핵화의 실질적 진전을 이루지 못한 채 성공으로 포장했던 1차 정상회담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 김정은은 행복할(happy) 것"이라며 "이번 협상을 지렛대 삼아 베이징을 자주 방문하며 중국과 새로운 단계의 우호적 관계를 구축, 미국의 제재를 피할 길을 뚫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만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하노이 회담이 싱가포르 회담 때처럼 '러브 앤드 피스(사랑과 평화)' 같은 얘기만 하고 김정은과 사진 찍은 걸 자랑하는 수준에 그치는 걸 원하진 않을 것"이라며 "작더라도 실질적인 협상 결과물을 끌어내려고 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얼마 전 스티브 비건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평양에 갔을 때 북한으로부터 '영변 핵시설 일부 폐기' 카드를 제시받은 것 같다"며 "이에 비건 대표는 상응 조치로 '종전 선언'이나 '한국 정부의 대북 제재 해제' 같은 카드를 테이블에 올린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는 이달 초 비건의 협상팀 일부가 평양에서 실무협상 도중 오산 미 공군기지로 돌아온 것과 관련해 "20여 년 전 우리 협상팀이 평양에서 협상할 때도 통신 보안 문제로 일시적으로 서울로 돌아와 워싱턴과 연락을 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캠벨 전 차관보와 갈루치 전 특사는 본지 인터뷰를 마친 뒤 청와대로 향했다. 이들은 "오늘 인터뷰한 내용을 청와대에도 모두 전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