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녀에게 액세서리 정도였습니다."
남미 페루에서 거주한 지 10년이 되는 김진찬(가명·29)씨는 지난해 여름 페루인 여자 친구와 사귀게 됐다. 한 여자가 식료품점에서 한국 라면을 사 들고 가는 김씨의 모습을 보고 친해지고 싶다고 먼저 말을 걸었다. 스무 살 페루 여성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에 김씨는 마음을 열었다.
그녀는 김씨가 챙이 넓은 '뉴에라' 모자를 쓰길 바랐다. 노란색, 회색으로 염색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살을 빼 슬림하고 탄탄한 몸을 만들라며 헬스클럽을 다니라고 했고, 심지어 아이라인을 그려주겠다며 화장 펜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 모임에 초대했다. 검은 선글라스에 뉴에라 모자를 쓰고 밑단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큰 '박스티'를 입어야 했다. 친구들의 관심은 폭발적이었다. "서울에 가면 정말 방탄소년단을 볼 수 있느냐" "엑소(EXO) 백현이 태어났다던 경기도 부천은 어떤 동네냐"는 질문이 쏟아졌다. 정작 김씨는 K팝에 큰 관심이 없었다. 단둘이 보는 날은 점점 줄어들었다.
"내가 한국인이 아니었다면 접근도 안 했을 거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만난 지 석 달. 김씨는 이별을 통보했고, 페루 여성의 페이스북에는 곧바로 다른 한국인 남자 친구의 사진이 올라왔다고 한다.
K팝의 애꿎은 피해자가 남미에서 생겨나고 있다. 일부겠지만, 한국인 남성을 과시용으로 사귀고, 일회성으로 소비하는 것이다. 현지의 한인들은 "K팝을 좋아하는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진짜 한국인을 만난다'라고 자랑하고 싶은 심리"라고 말했다.
베네수엘라에 거주하던 남모(27)씨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2016년 8월 남씨는 한 여성에게 "한국인이 맞느냐"는 페이스북 메시지를 받았다. 베네수엘라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찾다 남씨를 발견했다고 한다. 호기심이 동한 남씨는 직접 만났고 순수한 모습에 반해 연인 사이가 됐다. 그러나 남씨는 여자 친구와 한국에 관한 대화만을 했다고 한다. "(배우) 김수현을 실제로 본 적이 있느냐"는 따위의 질문들이었다. 남씨가 "나에 대해선 궁금하지 않으냐"고 화를 내자 "한국인이 화를 낼 줄 몰랐다"며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
남미에 살거나 살다 온 한국인들은 "K팝,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국인에게 호의적이다"라고 입을 모은다. 길을 걷는 도중 '한국인이냐'며 K팝에 대해 물어보거나, 대뜸 '한국 좋아해요'라는 한국말을 듣는 식이다. 그중 몇몇 사람은 한국 사람이라면 화낼 줄 모르고 경제적으로 부유할 것으로 여긴다고도 한다. 콜롬비아에서 6년간 살았다는 한 회사원은 "드라마, 예능 등으로만 접한 남미 사람들이 호기심으로 한국인에게 접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인터넷에도 K팝 팬 여성이 단순한 호기심으로 한국인과 사귄다는 게시물이 올라온다. 외국에 거주한다고 밝힌 한 한국 남성은 자신의 블로그를 통해 "K팝 팬들은 한국인을 본인들이 정해놓은 이미지로만 본다"며 "당해본 사람만 안다. 멀쩡한 한국인들이 상처받는 일은 부지기수"라는 글을 올렸다. 유튜브 채널 '크리스 취미생활'은 지난해 8월 '한국 남자가 K팝 성지 칠레에 가면 생기는 일'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통해 "처음 보는 여자가 나랑 결혼하자고 한다"며 2~3명의 칠레 여성에게 둘러싸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옐로 피버(yellow fever·서양 남성이 아시아 여성을 맹목적으로 좋아하는 현상)'의 남성판이라는 분석도 한다. 박영실 숙명여대 외래교수는 "여성에게만 적용되던 현상이 K팝을 계기로 한국 남성에게까지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진찬씨는 이제 더 이상 자신에게 접근하는 남미 여성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