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구 청량리역 역사(驛舍)를 빠져나오면 바로 눈에 들어오는 10층 건물이 있다. 62년간 청량리 서민을 진료한 성바오로병원이다. 환자 수십만명이 거쳐 간 이 병원이 긴 역사를 마감하고 오는 22일 문을 닫는다. 병원을 운영하는 가톨릭대 가톨릭중앙의료원이 다음 달 은평구 진관동 은평뉴타운 부근에 새 병원을 열면서 성바오로병원은 폐원하기로 했다. 이대 동대문병원(2008년 폐원), 중앙대 필동병원(2004년 폐원), 용산병원(2011년 폐원)에 이어 오랜 역사를 가진 강북의 구도심 병원이 또 하나 사라지는 것이다.
4일 오전 찾아간 성바오로병원 신관 2층 수납 창구는 여느 평일처럼 환자들로 북적였다. 대부분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르신이었다. 치료를 받고 병원을 나서는 환자들은 약봉지와 함께 은평구의 새 병원 위치를 안내한 전단을 들고 있었다. 귀가 잘 안 들리는 어르신을 붙잡고 간호사들이 병원 위치와 교통편을 설명했다.
유명 사립 의대에 소속된 성바오로병원은 반포동 서울성모병원이나 여의도 성모병원과 자매 관계다. 하지만 형편이 넉넉지 않은 서민 환자의 비중이 훨씬 높다. 병원의 역사 및 위치와 관련이 있다. 1944년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소속 수녀 2명이 청량리 옆 제기동에 차린 시약소(施藥所·의료 구제 시설)가 성바오로병원의 시작이다. 환자들이 몰리면서 시약소는 1947년 '성모의원'으로 확장 개원했다. 6·25전쟁은 병원에 시련이면서 도약의 계기였다. 병원 의사 이혜춘씨가 납북된 것이다. 의료진은 왕진 가방을 들고 잿더미가 된 주택가를 찾아다니며 환자를 진료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서울 인구가 늘면서 병원도 급속하게 커졌다. 1957년 현 위치인 청량리에 건물을 마련했다. 역과 맞붙어 있는 입지 덕에 '전국구 병원'으로 명성을 누렸다. 원주·제천·태백·영월·양평에서 통일호나 비둘기호 기차를 타고 내원하는 환자도 많았다.
1980년대 이후 병원은 정체되기 시작했다. 회기동 경희의료원, 안암동 고려대병원, 상계동 백병원 등 인근 대학병원이 대대적인 시설 투자에 나서면서 환자 유치 경쟁을 벌였다. 동대문문화원 강임원 사무국장은 "일정 소득이 되는 주민들은 다른 병원으로 옮겨가고, 서민 환자 비중이 높아지면서 경영진도 수익성 때문에 이전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량리역의 위상이 위축된 것도 타격이었다. 일부 주민들은 "병원 건물 뒤편으로 집창촌이 생겨나 부정적 인식이 확산된 것도 환자가 줄어든 요인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동네 주민들은 변함없이 병원을 찾는다. 이날 신경과 치료를 받은 제기동 주민 임규오(80)씨는 "시장통에서 평생 일하는 동안 아들 셋이 모두 이 병원에서 태어났고, 저는 두 차례나 이곳에서 수술을 받았다"며 "병원이 없어진다니 몹시 아쉽다"고 했다.
22일 치료를 공식적으로 마감하면 열흘 뒤인 다음 달 1일 은평구 진관동에 지상 17층, 800병상 규모의 최신식 병원이 진료를 시작한다. 전문의 80명을 포함한 직원 750명도 은평으로 옮긴다. "그래도 단골 의사를 찾겠다"는 어르신들은 교통편이 걱정이다. 청량리에서 은평구 병원까지는 버스로 40개 정류장을 지나야 한다. 지하철을 타도 15개 역이다. 병원 측은 셔틀버스 운영은 어렵다는 입장이다.
성바오로병원의 폐원으로 과거 청량리역 주변 모습은 사라지게 됐다. 병원 자리에는 고층 상업 건물이 들어설 예정이다. 병원과 붙어 있던 집창촌 밀집 지역도 아파트·주상복합 재개발이 시작되면서 대부분 철거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