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획의 팔뚝, 동양화가 김호득(69)씨의 먹이 주먹이 돼 가슴팍에 꽂힌다. 일순에 꺾이는 뼈마디('폭포')와 급소로 날아드는 손날('계곡')처럼 극히 단조로운 몇 번의 움직임이 치명타를 남긴다. "나는 그림이 무술과 같다고 생각한다. 고수가 될수록 힘의 낭비가 줄고 동작은 단순해진다."

김씨의 개인전이 4월 7일까지 서울 소격동 학고재에서 열린다. 신·구관을 채운 18점의 수묵화는 폭포 아래서 물의 타격을 맨몸으로 견디는 무인을 떠올리게 한다. 4년 전 대학 교수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여주 산자락의 작업실에서 수련한다. 붓 하나로 무(武)의 길에 들어섰으나, 커다란 광목을 일거에 베듯 그어낸 먹의 궤적에서 문(文)의 기운이 꿈틀댄다. "큰 붓으로 선 몇 개만 긋는 강력한 걸 해보고 싶었다. 핵심만 살리고 싶었다."

수묵화 ‘흐름’ 앞의 김호득. “폭포와 계곡을 분방하게 합쳤다”고 말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작년에 그린 '흐름'을 마주한다. "거의 다 망쳤는데 그나마 성공한 그림이다. 선의 각도가 수평이면서 살짝 올라가 있다. 단순하지만 이게 자연의 각도다. 산기슭 같고 공중을 휙 지나는 바람 같고." 최근 시도하고 있는 지두화(指頭畵)도 선보인다. 대형 산수 '산―아득'(2018)은 손가락으로 먹을 찍어 산맥을 그린 것이다. "기존 산수화 법칙에서 벗어나 형상을 평면화·단순화했다. 손가락을 비스듬히 눕혀 연주하듯 그린다. 재즈 틀어놓고."

하나의 동작에 갇히지 않는다. 회화에만 매달리지 않는 이유다. 후배 미디어작가 황규백씨와 작업한 '틈―사이'(2018)는 먹칠한 7장의 광목을 비스듬히 걸고 빔프로젝터로 영상을 비추는 설치작이다. 드론으로 공중에서 촬영한 파도가 연신 오고 간다. "물을 제외하고 동양정신을 설명할 수 없다"는 설명처럼, 이 역시 빛의 수묵이라고 할 수 있다.

김호득의 작품 속에서 물질과 여백은 대결하는 대신 어울리는 쪽을 택한다. 신관 맨 밑층을 가득 채운 설치작 '문득―공간을 그리다'(2019)는 이를 조용히 웅변하고 있다. 10×5m짜리 거대한 수조(벼루) 안에 먹물이 담겨 있다. 그 위에 줄지어 매달린 21장의 한지가 은은한 빛을 받아 풍등처럼 흔들린다. 종이가 먹을 기다리는 동안 수면의 위·아래가 서로 닮아간다. "입체라기엔 질량감이 없고 평면이라기엔 확장성이 크다. 공간이지만 비어 있고, 정지된 것 같지만 미묘하게 흐르고 있다." 그의 주재료는 사실 먹이 아니라 여백일지 모른다. (02)720-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