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가정 폭력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을 때린 40대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출동 당시 인기척이 없는 상황에서 경찰이 거주자 허락이나 영장(令狀) 없이 남의 집 안에 들어간 것은 잘못이라는 취지다. 그러자 경찰 내부에서 "황당한 판결"이라며 비난이 쏟아졌다. 경찰청은 내부 게시판에 '가정 폭력 범죄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판결'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대구지법 형사1부(재판장 최종한)는 지난 26일 경찰관을 폭행하고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된 마모(42)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1심에 이어 무죄를 선고했다. 판결문에 따르면 2017년 12월 신모 경위 등 경찰관 2명은 "아버지와 아들이 싸우는 것 같다"는 112 신고를 받고 대구 달서구의 한 아파트로 출동했다. 경찰관들이 현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렸지만 집 안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신 경위 등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 있던 마씨가 "당신들 누구냐"고 물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경찰관이 "신고를 받고 출동했는데, 집 안에 문제가 없느냐"고 하자 마씨는 "누구냐"고 거듭 묻다가 주방에 있던 유리병을 경찰관을 향해 던졌다. 주먹으로 신 경위 얼굴을 때렸다. 판결문에 따르면 마씨는 조현병을 앓고 있어 종종 소리를 질러왔다고 한다. 사건 당일에는 마씨와 어머니가 집에 있었다.
항소심 법원은 "경찰관이 마씨의 허락 없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간 행위가 적법하지 않다"며 마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경찰관직무집행법에 따르면 경찰관은 '사람의 생명·신체 또는 재산에 대한 위해가 임박한 때'에 한해 다른 사람의 건물에 들어갈 수 있는데,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무 집행 절차가 부당하기 때문에 마씨의 정신병력 유무와 상관없이 무죄라는 취지다.
지난 30일 일부 언론이 판결을 보도하자 경찰 내부 게시판에 판결문이 올라왔고 2일까지 3만명이 조회했다. 실명 댓글을 단 경찰관도 300명이 넘는다. "사건 현장 상황을 전혀 모르고 내린 판결" 등 판결을 비판하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한 경찰관은 "가정 폭력 신고의 경우 긴급 상황일 가능성이 큰데 판결이 무책임하다"고 했다.
경찰관들은 특히 2012년 오원춘 사건을 들어 판결을 비판했다. 경기도 수원에서 20대 여성을 토막 살해한 사건이다. 피해 여성이 112 신고를 했지만 출동한 경찰이 엉뚱한 곳만 찾다가 참변을 막지 못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경찰관 11명이 '초동 대처 미비'를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한 경찰관은 "오원춘 사건 이후 경찰 지휘부에서는 '112 신고가 접수된 경우 의심스러운 장소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들어가 확인하라'고 했는데 이번 판결에 따르면 이게 다 위법이라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경찰관은 "112 신고된 집이 조용하면 그냥 돌아오라는 건데, 그 후 발생할 수 있는 범죄는 누구 책임이냐"고 했다.
경찰관이 거세게 반발하자 경찰청은 논란이 벌어진 지 이틀 만인 지난 1일 경찰 내부망에 '대구지법 판결 조치 사항'이란 글을 올렸다. "(해당) 판결 내용은 가정 폭력 범죄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법리·정책적 검토를 반영하지 못했다"며 "검찰에 (대법원) 상고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경찰이 법원 판결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박하는 것은 이례적이다. 대구지검은 2일 상고했다.
임준태 동국대 경찰행정학부 교수는 "가정 폭력 신고로 출동한 상황에서, 경찰관이 가정집에 들어가 신분을 밝히고 상황을 파악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라 오히려 의무"라며 "법원이 경찰관 공무집행의 적법성 범위를 지나치게 좁게 해석했다"고 말했다.
☞오원춘 사건
2012년 4월 경기도 수원에서 조선족 오원춘(49)이 귀가 중이던 20대 여성을 납치해 성폭행하려다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 내 훼손한 사건. 피해 여성이 112에 신고해 범행 장소를 알려줬지만, 경찰은 현장에서 800m 떨어진 장소를 탐색해 범행을 막지 못했다. 소극 대응이 논란이 돼 경찰 11명이 징계를 받았다. 오원춘은 무기징역이 확정돼 복역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