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오전 11시 40분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이 임시 각료회의에서 하얀 종이에 세로로 적힌 한자(漢字) 두 글자를 들어 보였다. ‘아름다운 조화’라는 의미의 ‘레이와(令和·REIWA)’다. 나루히토(德仁·59) 왕세자가 다음 달 1일부터 새 일왕으로 즉위하면서 쓸 연호(年號)가 결정된 순간이다. 이로써 일본은 아키히토(明仁) 현 일왕의 ‘헤이세이(平成) 시대’를 이달로 마무리 짓고 ‘레이와 시대’를 맞게 됐다.

레이와는 일본의 248번째 연호다. 일본은 현재 전 세계에서 연호를 사용하는 유일한 나라다. 일본에서는 새 왕이 즉위하면 연호부터 달라진다. 근대부터 일왕 한 사람이 연호 한 개만을 쓰게 되면서 연호가 일본 내에서 시대를 구분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일본 국민은 30년 만의 새로운 연호 발표에 들뜬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이 2019년 4월 1일 오전 총리관저에서 일본의 새 연호 '레이와(令和)’를 발표하고 있다.

연호를 쓰는 ‘세계 유일의 나라’ 일본

일본은 일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연호와 일반적인 날짜 표기인 서력(西曆)을 함께 사용하고 있다. 연호란 특정 왕(군주)의 즉위 후 통치 기간을 일컫는 역법으로, 여러 기년법(紀年法·특정 시점 기준으로 햇수를 세는 방법) 중 하나다. 기원전 140년 중국 한무제(漢武帝)가 ‘건원(建元)이란 연호를 처음 쓴 이후 한·중·일·베트남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 연호를 썼으나, 지금은 일본만 쓰고 있다. 일본의 첫 연호는 645년 ‘다이카(大化)’다.

일본 헌정사상 현 일왕이 살아있을 때 다음 일왕을 위한 연호가 결정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아키히토 일왕이 고령을 이유로 예외적으로 생전 퇴위를 결정하면서 새 일왕의 연호가 즉위에 앞서 미리 발표됐다.

고대부터 중세까지는 한 일왕이 연호 여러 개를 쓰는 일도 많았지만 근대부터 일왕 한 사람당 연호 한 개만을 쓰고 있다. 연호가 요즘처럼 특정 시대를 상징하게 된 건 근대화가 시작된 1868년 ‘메이지 유신’ 때부터다.

일본은 연호를 널리 쓰고 있다. 일본은 관공서 공문부터 개인 은행 통장, 대출 신청서, 부동산 계약서 등에 서력보다 연호를 쓴다. 연호가 바뀌면 그 모든 문서가 따라 바뀐다.

연호를 만드는 ‘6대 원칙’

연호가 정해지려면 까다로운 원칙을 거쳐야 한다. 일본 정부는 1979년 정한 6가지 기준에 따라 연호 후보를 검토한다. 연호를 제정할 땐 △두 글자 한자로 이뤄진 단어일 것 △국민의 이상(理想)에 어울리는 좋은 의미일 것 △쓰기 쉬울 것 △읽기 쉬울 것 △사회에서 널리 쓰이지 않는 단어일 것 △지금까지 연호나 시호(諡號·왕 등이 죽은 후 공덕을 칭송해 붙인 이름)로 사용되지 않은 단어일 것이 고려돼야 한다.

알파벳 초성도 고려 대상이다. 근대 이후의 연호와 알파벳 초성이 겹치지 않아야 한다. 컴퓨터 프로그램 등에서 연호를 알파벳 초성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혼동을 줄이기 위해서다.

연호의 ‘출전(出典· 인용 글의 출처 서적)’도 밝혀야 한다. 일본은 연호에 좋은 의미를 담기 위해 연호의 출전을 알리고 있다. 그간 일본의 연호는 주로 중국 고전에서 인용돼 왔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인용 횟수가 가장 많은 건 시경·서경·역경·춘추·예기를 뜻하는 중국 고전 ‘오경(五經)’이다. 서경은 총 36회, 역경은 27회 인용됐다.

레이와는 ‘최초의 日 고전 연호’

이번엔 달랐다. 레이와는 일본 역사상 가장 ‘특별한’ 연호다. ‘최초의 일본 고전 연호’이기 때문이다. 레이와는 일본의 최고(最古) 시가집 ‘만요슈(萬葉集·만엽집)’에서 따왔는데, 일본이 서기 7세기 연호를 처음 도입한 후, 일본 고전을 인용해 연호를 만든 것은 레이와가 처음이다.

아베 총리는 지난 1일 연호 기자회견에서 만요슈를 ‘국서(國書)’라 칭했다. 만요슈는 8세기 일본 나라(奈良) 시대에 편찬됐다. 서기 347년부터 759년까지 일본의 시가 4500여 수(首)가 담겨 있다. 일왕 가족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지은 게 특징이다. 문학적인 가치와 함께 고대 일본인의 생활과 사상을 알 수 있어 중요한 서적으로 대우받는다.

레이와는 만요슈 '매화(梅花)의 노래 32수' 중 '초춘영월 기숙풍화(初春月 氣淑風)' 구절에서 따왔다. 초봄에 무엇을 하든지 좋은 시기에, 공기는 상쾌하고 바람은 부드럽다는 의미다. 일본 정부는 이 문장에서 '영(令)'과 '화(和)'를 합해서 레이와를 만들었다.

‘영(令)’은 주로 법령·규칙의 의미로 쓰이지만, 아름답고 좋다는 의미도 있다. ‘화(和)’는 조화·화합을 뜻하는 말로, 와쇼쿠(和食·일본 음식), 와규(和牛·일본 소)처럼 일본을 나타내는 한자어다. 아베 총리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레이와에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마음을 맞대면 문화가 태어나고 자란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했다.

레이와 전까지 10세기 이후 일본의 모든 연호는 중국 고전을 출전으로 했다. 일본 고전은 한자 발음만 따온 경우가 많아 한자 자체에는 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베 신조 정권의 지지 기반인 보수파를 의식해 일본 고전에서 연호를 인용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 고유 문화를 강조하려는 아베 내각의 ‘정치 계산’이 깔려있다는 평이다.

2019년 4월 1일 일본 도쿄에서 시민들이 오는 5월 1일 시작되는 새 나루히토(德仁·59) 일왕 시대의 연호(年號)로 '레이와(令和)’가 선정됐음을 알리는 신문 호외를 먼저 받기 위해 손을 뻗치고 있다.

"‘명령’ 아닙니다. ‘아름답다’로 읽어 주세요"

레이와의 첫 글자인 ‘영(令)’을 두고 잡음이 생기기도 했다. 영에 아름답다·좋다는 뜻외에 법령·규칙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는 걸 두고 외국에서 아베 내각 의도와는 다른 해석을 내놓은 것.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국제 사회에 영의 영어 번역이 ‘오더(Order·명령)’이 아닌 ‘뷰티풀(Beautiful·아름답다)’이라고 적극 홍보하기도 했다.

영미 언론은 레이와를 설명할 때 주로 오더나 ‘커맨드(Command·지시)’로 표현하면서 부정적으로 번역했다. 로이터는 새로운 연호와 관련, "권위주의적 느낌이 일부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다’"고도 했다. 뉴욕타임스는 "이번 연호에는 규칙·법의 의미도 있다. 군사적 역할 확대를 주장하는 아베 내각이 정했다"고 지적했다. 이들 매체뿐만 아니라 일본 야당인 사민당도 "영은 명령을 뜻하기도 해 아베 정권이 지향하는 국민 통제 강화가 드러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이 때문에 일본 정부는 급히 수습 작업에 들어갔다. 일본 외무성은 외국 정부에 레이와를 영어로 설명할 때 ‘아름다운 조화(Beautiful Harmony·뷰티풀 하모니)’로 번역할 것을 재외 공관에 지시했다.

레이와 고안한 日 교수 "만요슈, 韓 영향받았다"

레이와가 공표된 후 사람들의 관심은 레이와를 고안한 사람에게로 쏠렸다. 일 언론은 익명의 정부 관계자를 인용, 나카니시 스스무(中西進·89·사진) 오사카여대 명예교수가 레이와를 고안했다고 지난 3일 보도했다. 다만 그는 "레이와를 고안한 게 맞느냐"는 질문에는 "말씀드릴 게 없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공개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공식적인 고안자 공개는 공문서 기밀이 해제되는 30년 후에야 가능할 전망이다.

나카니시 교수는 한반도 고대 시가와 한반도에서 온 ‘도래인(渡來人·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온 사람)’이 만요슈에 실린 일본 시가에 영향을 줬다고 본다. 만요슈의 작자 중 한 명인 야마노우에 오쿠라(山上憶良)가 백제에서 온 도래인이라는 학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일본 단카(短歌·일본 전통 시) 시인인 고(故) 손호연씨 등과 교류가 깊은 지한파(知韓派)로도 알려져 있다.

레이와 시대를 맞은 시민들, 순간 ‘와!’

일본 사회는 새로운 연호 발표에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도쿄 신주쿠(新宿)역 광장과 오사카의 중심가인 도톤보리(道頓堀)의 대형 모니터 앞에 모여든 시민 수천여명은 연호가 발표되자 일제히 환호했다고 한다. 마이니치·요미우리신문은 호외(號外)도 발행했다. 식당들은 레이와 글자를 문 앞에 내걸었다. 달력 업체는 새 제품 제작에 들어갔다. 만요슈는 인터넷 검색 상위권을 줄곧 차지했다.

일본 정부와 언론도 새 연호 확정을 계기로 새로운 시대로 도약하자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평소 사설 2개를 게재해 온 마이니치·요미우리·니혼게이자이 등 주요 신문들은 1일 자에 새 연호와 관련된 사설만을 올렸다. 모두 새 연호 확정을 계기로 새로운 시대를 맞자는 기대감을 표했다.

NHK에 따르면 일본 정부 등 행정기관이 관리하는 세금·사회보장 등 총 576개 정부 시스템은 한 달 동안 새 연호에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업데이트할 예정이다. 민간 기업도 비슷한 작업을 해야 한다. 업데이트가 늦어지면 기업 회계 시스템이나 발주 시스템에 새 연호를 기재해도 제대로 인식이 안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이 2019년 4월 1일 오전 총리관저에서 일본의 새 연호 '레이와(令和)’를 발표하는 장면이 오사카(大阪) 도톤보리(道頓堀)에서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형 모니터를 통해 나오고 있다.

레이와와 중국

중국에서는 레이와가 ‘최초의 일본 고전 연호’라고 하지만 실제론 중국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레이와 출전 구절이 중국 시문집 ‘문선(文選)’에 있는 ‘중춘영월시화기청(仲春令月時和氣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문선은 만요슈보다 약 2세기 앞서 편찬된 것으로 전해진다.

또 레이와가 중국에서 지난해 10월 중국상표국에 주류 상표로 등록된 사실도 알려졌다. 교도통신에 따르면 미리 ‘레이와’를 상표로 등록한 중국인은 지난해 10월부터 10년간 사용권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