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리요코의 오래된 명작 ‘베르사유의 장미’ 완전판을 다시 한 번 감상했다. 1980년대나 1990년대에 태어난 독자들, 그리고 그들의 부모님들이라면 1990년대에 동네마다 꼭 있었던 비디오 대여점, 혹은 텔레비전에서 방영해 준 애니메이션판으로 이 작품의 이름이 귀에 설지 않으실 것이다. 여왕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의 남편인 루이 16세와 애정 관계였다고 알려진 한스 악셀 폰 페르젠 등 역사 속의 진짜 인물들과 순수한 작가의 창작이 만들어낸 인물인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 오스칼의 소꿉친구이자 연인인 평민 앙드레 그랑디에를 탁월하게 섞어 놓아 모녀가 함께 보는 작품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는 남장 여자라는 클리셰를 확립한 인물로서 셀 수 없이 많은 매체에서 2차 창작되었다. 외모도 뛰어나지만 무력도 상당하다. 이는 대대로 군인 집안인 자르제 가문에서 딸만 태어나자 이 막내딸을 아들로 키워 군인으로 만들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인 어린 나이에 근위대에 발탁되어 마리 앙투아네트의 경호를 맡게 된 오스칼은 누구보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진심으로 섬기고 그녀의 안위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나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소용돌이의 핵심 중 하나였던 왕정 철폐의 국민적 요구 속에서 그저 평범한 한 여자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해내기는 무리였다. 장 자크 루소의 ‘사회계약론’이나 ‘누벨 엘로이즈’ 같은 다양한 책을 읽으며 점점 시민들에게 감화되어가는 오스칼과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는 뼛속부터 왕족이었다. 그녀는 역대 왕족들의 씀씀이에 비하면 매우 검소한 편이었다고 하나 때를 잘못 만난 여왕이었다. 흔히 알려진 “빵이 없으면 과자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 역시 그녀의 말이 아니라고. 하지만 혁명은 피를 필요로 했다.
선량하지만 남자다운 매력이 없는 루이 16세 대신 수려한 스위스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젠과 마리 앙투아네트는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지만, 두 사람의 신분 때문에 밀회조차도 어렵다. 페르젠은 왕비와의 추문을 덮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에 출전한다. 그런 그가 흔든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음만이 아니었다. 평생을 군복에 감싸여 살아온 오스칼의 마음 역시 흔들린 것이다. 한 번이라도 그의 눈에 여성으로 보이고 싶다는 소망이 생긴 오스칼은 페르젠이 미국 독립전쟁에서 무사히 돌아온 후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성의 복식을 몸에 걸친다. 터키풍의 드레스를 입은 오스칼이 왕실 무도회에 등장하자, 그 아름다움에 사람들은 술렁거린다. 오스칼의 정체를 알아채지 못한 페르젠은 그녀에게 춤을 청한다. 오스칼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단 한순간이라도 여성으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그 자리를 떠난다. 얼마 후 오스칼과 이야기를 나누다 오스칼이 그때의 귀부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한 페르젠은 그녀에게 두 번 다시 만나지 말자고 한다. 자신의 마음은 이미 마리 앙투아네트의 것인데, 최고의 친구로서 아끼고 있는 그녀에게 헛된 희망고문을 할 수 없으니 확실히 잘라내 버린 것이다. 당장은 잔인할지 몰라도, 장차 생길지도 모르는 상처를 미리 차단했다는 면에서 역시 신사라고 할 수 있다. 어렸을 때는 이 부분에서 페르젠의 훌륭함을 몰랐는데, 어른이 되고 나서 보니 그는 정말로 신사였다. 결코 맺어질 수 없고 손 한 번 잡아 볼 수도 없는 여인을 사랑하고 있는데 오스칼처럼 지체도 높은 데다 지성적이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될 경우, 웬만한 졸장부라면 상처받지 않도록 쳐내기는커녕 이게 웬 떡이냐 하고 입이 헤벌어져 곁에 꼭 붙여 놓으려고 갖은 애를 다 썼을 것이다. 왕비와는 절대로 가능하지 않은 육체적 사랑을 찾거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시름하는 자신에 대한 위로를 구하는 등 몸과 마음 속속들이 이용해먹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어른이 되고 나니 앙드레에게 좋은 점수를 주기도 어려워졌다. 예전에도 술에 취한 오스칼에게 키스했던 전적이 있는 앙드레는 오스칼이 사랑에 빠진 것을 보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오스칼이 군인으로 있는 한 자신의 것은 아니어도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참을 수 있었건만,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혁명의 전조를 느낀 오스칼의 아버지가 남편에게 보호받기를 기대하고 신랑감을 찾는 무도회를 열자, 오스칼은 남성용 예장 차림으로 참석해 연회를 한껏 비웃는다. 이 와중에 떠나지 않는 구혼자가 있는데, 그는 기병대 시절 오스칼의 부하였던 잘생긴 귀족 제로델이다. 그는 앙드레의 마음도 눈치 채고 그에게 아내 곁에 사모하는 하인 정도는 눈감아 주겠다고 말한다. 페르젠에 이어 제로델까지, 잘난 남자들이 연달아 나타나자 앙드레는 초조한 마음에 오스칼의 옷까지 찢으면서 억지로 관계를 가지려 하기도 하고, 저승에서라도 맺어지겠다며 독이 든 포도주를 함께 마시려 준비하는 등 갖은 삽질을 하지만 오스칼은 그의 아내가 되겠다며 손을 내민다.
오스칼을 지켜줄 무력도, 지위도, 재산도 없는 자신이라도 괜찮겠느냐는 앙드레의 질문에 오스칼은 대답한다. 정말로 소중한 것은 마음 착한 남자라는 사실을, 대부분의 여자는 이미 나이를 먹고 나서야 깨닫는다고. 그래서 마음 착한 것 말고는 뭐 하나 가진 것 없는 앙드레가 우리의 히로인을 차지해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고, 오스칼과 앙드레는 왕실을 등지고 시민들의 편에 서서 목숨을 바치게 된다. 오스칼이 이끄는 프랑스 위병대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은 제로델은, 나를 피로 적시고 그 위를 지나가라는 오스칼의 외침에 말머리를 돌린다. 사랑했던 당신에게 그렇게 할 수가 있겠느냐, 차라리 단두대에 서겠다며 철수한 제로델. 군인으로서 명령불복종은 심각한 죄명이니, 그에게도 좋은 대접은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오스칼이 민간인으로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나는 몹시 안타까웠다. 이 ‘언니’가 평생 군생활만 해서 남자 보는 눈이 별로 없구나…. 아무리 소꿉친구의 정이 깊다 해도 추행범에 강간미수범에 동반자살 미수범을 택할 이유는 없는데…. 이 언니가 군인이라 의리하고 사랑을 혼동했구나…. 제로델 괜찮아 보이는데…. 앙드레는 하인으로 데려가면 되지….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니 아악 어른이 되고 나니 영혼이 썩고 말았어! 하고 비명을 지르며 책을 덮고 말았다. 그래도 이게 다 오스칼 잘되라는 마음인데. 어쨌든 앞으로 어렸을 적 사랑했던 순정만화는 피하기로 했다. 추억은 소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