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히토 일왕의 퇴위로 부인 미치코〈사진〉 왕비도 일본 사회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올 초부터 미치코 왕비를 다룬 서적과 사진집, 달력 등이 잇따라 출판돼 서점가 특설 코너를 차지하고 있다. 아키히토뿐 아니라 미치코도 일 왕실의 대중적 인기를 높이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미치코 왕비를 설명하는 가장 유명한 키워드는 '첫 평민 출신 왕비'다. 두 사람은 아키히토가 왕세자이던 1957년 나가노현 가루이자와의 한 테니스 코트장에서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혼성 복식 경기에서 상대팀으로 만났는데, 아키히토팀이 패했다. 이후 왕세자가 미치코에게 호감을 표하면서, 미치코가 약혼자 후보로 떠올랐다.
미치코는 닛신제분 창업자의 딸로 친정이 자산가 집안이다. 성심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재원이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신분의 차이'를 이유로 결혼에 반대했다. 아키히토가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설득한 끝에 1958년 11월 두 사람의 결혼이 결정됐다. 두 사람의 연애 스토리는 '테니스 코트의 사랑'으로 불리면서, 당시 자유연애가 확산되던 일본 사회에서 큰 관심을 모았다. 언론은 미치코를 '신데렐라'로 표현했다. 여성들 사이에선 그의 패션과 스타일을 따라 하는 '미치붐(미치코붐)'이 불기도 했다.
미치코 왕비는 자녀를 낳아 직접 기르는 등 '파격 행보'를 이어갔다. 자녀를 직접 양육하지 않고 보육관에게 맡기는 전통을 깬 것이다. 마이니치신문은 "사이 좋은 부부와 아이의 모습이 국민에게 '현대의 이상적인 가족'으로 비쳤다"고 했다.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왕실 내에선 심한 시집살이와 따돌림에 시달렸다는 소문도 늘 따라다녔다. 이 때문에 동년배 여성들 사이에 '공감대'가 싹텄다는 말도 있다.
아키히토 일왕이 전국 각지를 방문하는 데에도 늘 함께했다. 1992년 야마가타현에서 열린 국민체육대회 개회식에 참가했을 때의 에피소드는 일본 미디어가 일왕 부부를 조명하며 거론하는 단골 사례다. 당시 개회식에 난입한 한 남성이 일왕 부부를 향해 화염병을 던졌는데, 미치코 왕비가 겁을 먹기보다 손을 들어 일왕을 보호하려 했다는 것이다. 올 2월엔 아키히토 일왕이 즉위 30년 기념식에서 소감을 밝히다, 준비한 몇 장짜리 원고의 순서를 틀리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때 미치코 왕비가 곧장 실수를 눈치 채고 순서에 맞는 원고를 함께 찾아주는 모습을 일본 언론은 크게 조명했다. 두 사람의 지난 60년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이유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