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어다 뿌리는 바람조차 씨원타 /솔나무 가지마다 새춤히 고개를 돌리어 뻐들어지고 / 밀치고 밀치운다.’
높이 1m 직육면체 기계 상단에서 ‘짧은 글' 버튼을 누르자 폭 8㎝의 종이에 윤동주 시 ‘바다’가 인쇄돼 나왔다. ‘긴 글' 버튼을 누르자, 이번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이 출력돼 나왔다. 커피나 캔 음료 대신 시와 소설을 뽑아주는 이른바 ‘문학자판기'다.
최근 문학자판기 ‘인증샷’이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SNS)에서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청년 스타트업 ‘구일도시'에서 제작하는 문학자판기는 전국 120여 곳에 설치돼 시민과 만나고 있다.
지난 10일 조선일보 디지털편집국은 서울 중구의 사무실에서 문학자판기를 개발한 전희재(28) 구일도시 대표를 만나 인터뷰했다. 전 대표는 문학자판기 개발 취지를 묻는 질문에 "한국의 독서율은 떨어지는 가운데, 서점가에 자기계발서와 취업 관련 서적만 늘어나는 상황에 문제의식을 느껴, 문학자판기를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전 대표는 문학자판기의 장점으로 ‘보편성'을 꼽았다. 그는 "문학자판기만 있다면 남녀노소 누구나 즉석에서 수천여 편의 문학작품을 만날 수 있다"며 "누구나 아는 유명작가의 작품에서 처음 보는 작가까지, 국민들의 문학 스펙트럼을 넓혀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문학자판기는 버튼을 누를 때마다 시·소설·수필 5000여편 중 하나를 무작위로 인쇄해준다. 이상, 정호승 등 국내 작가뿐 아니라 헤르만 헤세, 밀란 쿤데라, 무라카미 하루키 등 해외 작가들의 작품도 포함돼 있다. 많게는 500여편의 새 작품을 매달 업데이트하고 있다. 최근에는 신예 이슬아와 백세희 작가의 글도 추가됐다.
전 대표가 문학자판기 개발에 매진하기 시작한 것은 2017년 초부터. 프랑스, 영국 등 유럽국가에서 문학자판기가 막 유행을 타던 때다. 때마침 우리나라의 낮은 독서율이 사회적 이슈가 됐다.
문화체육관광부에 따르면 2016년 10월부터 2017년 9월까지 1년간 교과서, 만화, 잡지를 제외한 일반 도서를 1권이라도 읽은 사람의 비율(독서율)은 성인 59.9%, 학생 91.7%로 나타났다. 이는 2015년 조사 때와 비교해 성인은 5.4%포인트, 학생은 3.2%포인트 감소한 수치며, 1994년 처음 조사가 시작된 이후 역대 최저치다. 성인의 40%가 책을 1권도 안읽는다는 의미다.
전 대표는 "우리나라에서 문학자판기를 도입하면 ‘인기를 끌 수 있겠다’는 생각보다는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며 "사업도 좋지만, 문학에 대한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심을 키우고 싶었다"고 했다.
전 대표가 문학자판기 사업을 준비하는 데에 한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먼저 출판사 등에서 저작권 문제 없이 홍보용으로 제공하는 시·소설·수필 속 글귀 수천 개를 모은 뒤, 수작업으로 일일이 컴퓨터에 입력했다. 이후 개발팀을 꾸려 글귀들을 출력해주는 알고리즘을 개발했다.
그해 서울국제도서전에 처음 선보인 시제품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매일 수백명이 넘는 시민이 문학자판기 앞에 줄을 섰고, 인쇄지는 1시간마다 동이 났다. 이후 소셜미디어를 통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문학자판기는 대구·용인 지하철과 양산·김해 시청을 비롯해 용인 의무후송항공대에도 설치됐다. 현재 전국에서 매일 1만명이 문학자판기를 사용하고 있다.
문학자판기는 기업간거래(B2B) 사업이다. 기업이나 지자체 등에서 복지나 문화 활동의 일환으로 비용을 들여 설치하고 있다. 문학자판기의 월 임대료는 30만~50만원으로 전액 설치한 기업이나 지자체에서 지불하고 있다.
전 대표는 "우리는 영업팀이나 담당이 따로 없고, 문학자판기의 가치를 알아준 기업이나 기관에서 먼저 연락을 준다"며 "문학자판기의 인기비결은 소셜미디어(SNS)와 입소문이라고 생각한다. 전국 모든 지하철역에 문학자판기를 설치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