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이인영 원내대표와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이 정부 관료들을 싸잡아 비판한 대화 내용이 알려지자 주요 부처 공무원들은 부글부글하는 분위기다. 관료 사회에 대한 당·청(黨·靑) 핵심 인사들의 평소 편향된 인식이 그대로 드러난 것 아니냐는 것이다. 부처 관료들은 청와대에 대해 "독단적으로 정책 방향을 정한 뒤 무조건 따르라고 지시했으면서 왜 책임은 우리에게 돌리느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묵묵하게 열심히 일했는데 평가가 너무 박하다"며 섭섭함을 토로하는 공직자들도 많았다.
◇"무리한 정책 펼치다 안 되면 공무원 탓"
이번에 국토교통부는 '대표적 문제 사례'로 지목됐다. 최근 버스 노조의 총파업 예고 사태가 국토부 관료들의 복지부동 때문에 벌어졌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국토부에선 "정책 방향이 잘못된 게 근본적 문제"라는 말이 나왔다. 국토부 고위 관계자는 "청와대와 여당이 '대통령 공약'이라면서 주 52시간 근로제를 강행한 것이 버스 사태의 원인인데, 왜 공무원만 걸고넘어지느냐"고 했다.
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을 추진하면서 야당의 집중포화를 받았던 산업통상자원부도 "말을 안 듣거나 일을 안 한 적이 없는데 너무하다"고 했다. 산업부 관계자는 "청와대와 여당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정부 부처가 하겠느냐"며 "결국 책임은 청와대에 있는 것 아니냐"고 했다. 다른 산업부 인사는 "탈원전 정책으로 욕도 많이 먹고 숱한 비판도 받았지만, '레임덕'이 온 것처럼 무책임하게 대응하지 않았다"며 "(탈원전) 부작용을 줄이려고 최선을 다해왔는데, (관료 탓을 한다면) 평가가 박한 것"이라고 했다.
경제 관련 부처에선 "청와대가 바른 방향을 제시하면 정부 부처도 자연스레 일해 나갈 수 있는데 청와대가 바른 방향으로 가지 못하니 각종 저항에 부딪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기재부의 한 과장은 "청와대에서 결론을 다 정해놓고 밀어붙이다 그대로 안 되면 '공무원이 제대로 준비를 못 한 탓'이라고 한다"고 했다.
◇"관료들 일하는 동안 당·청은 뭐했나"
주요 부처 공무원들은 이 원내대표와 김 실장의 지적에 대해 "하라는 대로 열심히 했는데 섭섭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국토부 관계자는 "청와대와 여당은 큰소리만 쳤지 도대체 무슨 노력을 했느냐"며 "우리 탓만 하는 건 너무하다"고 했다. 또 다른 국토부 인사는 "최근 버스 사태 해결의 열쇠가 될 수 있는 '버스 요금 인상안'을 경기도가 최종 거부해 협상이 결렬됐다"며 "이 과정에서 민주당 소속인 이재명 경기지사를 민주당이 설득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당·청은 사태 해결에 전혀 힘을 보태지 않고 방관만 했다는 주장이다.
산업부 한 공무원은 "산업 살리기 대책을 내고, 일본과의 수산물 소송에서 이기는 등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기운 빠지는 소리만 듣는다"고 했다. 경제 부처의 한 관료는 "솔직히 일 안 하는 국회가 공무원들 일 안 한다고 하느냐" "당·청 수뇌부의 속내가 드러난 것 같아 씁쓸했다"고 했다.
외교부에선 "청와대의 '독주'에 끌려가고 있는데 욕은 우리만 먹는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왔다. 한 외교관은 "청와대가 모든 현안을 좌지우지하면서도 외교부엔 비핵화 협상의 정보도 안 준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체코 면담 논란'은 외교관들 사이에서 대표적인 '외교부 무시' 사례로 꼽힌다. 작년 11월 문 대통령이 체코 총리와 '정식 회담'이 아닌 '비공식 면담'을 해 논란이 됐을 때 청와대가 '회담이 맞는데 실무자가 면담으로 오기(誤記)했다'며 외교부 탓으로 돌렸다는 것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청와대가 티 나는 건 다 가져가고, 하기 싫은 일 뒤처리만 (외교부에) 시키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