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 입단해 30년 넘게 활동하다 보니 일본 바둑의 부진이 너무 안타깝네요. 간판스타인 이야마 유타마저 8강 진출에 실패해 아쉽습니다." 재일 프로기사 류시훈(48) 9단의 말이다. 그는 지난주 끝난 제24회 LG배 조선일보기왕전 개막전 때 일본 팀을 이끌고 단장으로 내한했다.

류 9단은 조남철·김인·조훈현·조치훈·하찬석·조선진 등으로 내려온 일본 유학파의 막내다. 바둑으로 대성하려면 일본 유학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는 말이 상식으로 통할 만큼 당시 일본은 세계 바둑의 선진국이었다. 이창호·김원 등과 치열하게 경쟁하던 류시훈은 1986년 15세 때 도일, 오에다(大枝雄介) 문하에서 1988년 입단했다.

한국의 마지막 일본 유학파 세대였던 류시훈 9단. "세계 바둑의 균형 발전을 위해 일본의 개혁에 앞장서겠다"고 다짐했다.

이후 일본 7대 타이틀 중 하나인 천원 3연패(1994~96년), 왕좌 획득(1996년), 천원 탈환(2000년) 등 일본 최정상권 기사로 활동했다. 조치훈·고바야시 고이치·다케미야·가토 등 철통 같던 기존 최강 그룹을 헤치고 우승할 때마다 '새 얼굴' 류시훈은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그가 전성기를 맞은 1990년대 중반부터 일본은 국제무대 전면서 물러나고 한국이 중심에 서기 시작했다.

"일본 바둑의 실력이 준 건 아니고 한·중이 폭발적으로 발전한 거죠. 일본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분위기, 그리고 상대적으로 승부에 대한 낮은 집착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일본기원 소속 기사가 LG배 통합예선을 마지막으로 통과한 것이 12년 전 12회 때였고, 그 당사자가 바로 자신이었음을 류 9단은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류시훈은 "바둑 세계화를 위한 전제 조건은 동양 3국의 균형 발전"이라며 자신이 일본 바둑의 개혁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랭킹 제도만 해도 동양 3국 중 일본에만 없어요. 세계 흐름에 발맞춰야 합니다." 랭킹제는 몇 번 도입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체면을 중시하는 일부의 반발로 백지화됐다고 한다. "대국용 시계를 꼭 제3자가 눌러줘야 한다는 식의 권위 의식도 털어내야 해요."

류시훈은 최근 정원 6명의 일본기원 평의회(平議會) 멤버로 선임됐다. 무보수직이지만 이사회의 결정을 감시하고 수정하는 기구여서 영향력이 크다. 류시훈이 강조하는 '전통을 지키면서 펼치는 개혁'도 추진력을 얻게 됐다. 1년간 맡아온 연구생 사범 임무는 최근 2년 더 연장됐다. 도일 전 자신이 1년 반 몸담았던 한국기원 연구생 시절이 자주 떠오른다고 했다.

"세계 바둑 판도 격변기에 무대를 옮긴 마지막 세대로서, 세계의 주인공 자리에 오르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어요. 하지만 바둑 세계화란 큰 그림 아래 일본 안에서 역할을 찾는 것도 보람 있다고 생각합니다." 류시훈은 "나이 때문에 바둑이 약해진다곤 생각하지 않는다"며 지금도 타이틀 획득의 꿈을 향해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