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브리데이(날마다) 위스키이이이!"

짐 아저씨는 나와 마주칠 때마다 손을 흔들며 이렇게 인사했다. '안녕'처럼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말이었다. 짐 매캘런씨는 내가 얼마 전 한 주를 지낸 스코틀랜드 아일라(Islay·현지 발음)의 게스트하우스 주인이다. 아일라는 스코틀랜드 서남쪽에 있는 섬이다. 서울만 한 크기의 섬에 백령도 인구보다 적은 3000여 명이 산다. 일본·한국 위스키 마니아들은 이 소박한 섬을 성지(聖地)로 숭배한다.

청년미래탐험대원 김종언씨가 스코틀랜드 아일라섬 브뤽라디증류소에서 참나무통 보관소 담당자 로버트 매케건(36)씨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다. 그는 "위스키가 참나무통의 바다 내음을 머금을 때까지 보관한다. 아일라 위스키 특유의 갯내음은 여기서 만들어진다"고 했다.

1990년대 일본에서 시작된 싱글몰트 위스키 바람이 요즘 한국에도 몰아치고 있다. 2000년대 초반 10여개에 불과했던 싱글몰트 위스키 바는 전국 300개를 넘어섰다. 싱글몰트 위스키는 100% 보리만을 사용하고 다른 증류소 것과 섞지 않은 위스키를 뜻한다. 증류소별로 특성이 확실해 개인 취향을 중시하는 요즘 트렌드와 잘 맞는다. 그중 가장 개성 강한 싱글몰트 위스키를 만드는 곳이 아일라다. 브뤽라디·아드벡·라가불린…. 아일라 위스키는 전 세계 위스키 품평회의 최우수상을 습관처럼 휩쓴다. 이 작은 섬은 어떻게 위스키로 세계를 평정했을까. 답을 찾아 스코틀랜드로 향했다.

◇참나무, 바다를 100년 머금다

'아일라 위스키는 땅·물·지역이 사고(事故)처럼 충돌해 (그 맛을) 만들어낸다.' 1887년 '영국의 위스키 증류소'를 쓴 앨프리드 바너드는 아일라 위스키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책에 1800년대 이전에 세워진 9개 증류소를 소개했는데, 7개가 여전히 가동 중(새 증류소 포함하면 총 8개)이다. 산업혁명으로 세상이 뒤집히고 인터넷이 발명돼 지구가 빛의 속도로 연결되는 동안 이 섬사람들은 맛 좋은 위스키를 조용히 지어냈다는 얘기다.

아일라섬 해변에 놓여있는 참나무통. 길게는 100년까지 그대로 둬서 바다 내음을 입힌다.

해초를 태운 듯한 향기, 혀끝을 스치는 짭조름함, 파도 같은 알싸함…. 아일라 위스키를 한 모금 머금었다. 바다가 입안에서 출렁인다. 처음 찾아간 아드벡 증류소 관리자 론 가우디는 "아일라의 모든 증류소는 바닷가에 있다. 위스키가 대서양 바람을 품어야 하니까"라고 했다.

아일라 위스키를 만드는 과정은 4단계로 나뉜다. 보리를 발아시켜 건조하고(1단계), 여기에 뜨거운 물을 섞어 발효(2단계)한다. 증류해서 도수 높은 맑은 술을 뽑아내고(3단계) 참나무통에 숙성(4단계)시킨다. 위스키의 바다 내음은 마지막 단계와 연관이 깊다. 아일라 증류소는 위스키를 숙성시킬 참나무통에 오랫동안 바닷바람을 맞힌다. 어떤 참나무는 한 해로 충분하지만 100년 넘게 바다화(化)를 해야 하는 참나무통도 있다. '때'가 되면 증류한 위스키 원액을 여기에 붓는다. 참나무는 투항하듯 그동안 품었던 바다의 기운을 위스키에 건넨다. 탐험 둘째 날 찾은 브뤽라디 증류소. 해변엔 참나무통 30여 개가 바다를 흡수하고 있었다. 준비 기간 1년과 100년. 그 차이는 어디서 나올지 궁금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로버트 매케건은 "바다, 바다, 바다"라고 답했다. 모두 바다 맘대로란 얘기였다.

◇숯 향, 그리고 사람에 매혹되다

아일라 위스키의 독특함을 결정하는 또 하나의 요소는 피트(peat·이탄(泥炭))향이다. 피트는 오래되지 않은 석탄의 일종이다. 아일라 피트는 이끼와 해산물 등이 분해돼 만들어져 내륙산(産)으론 대체가 안 된다. 보리를 말리는 주조 첫 단계에 피트로 땐 불을 사용한다. 약 냄새 비슷한 독특한 숯내가 이때 보리와 합체한다.

아일라 위스키를 완결하는 마지막 한 조각은 너무나 '위스키위스키한' 아일라 사람들이었다. 주민들이 밤마다 모여 위스키를 홀짝이며(혹은 들이켜며) "젊은이와 노인 중 누가 더 위대한가" 따위의 이야기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모두가 모두를 다 알았다. 우리도 곧 일원이 되었다. 길에서 만나면 '오늘도 한잔?'이라는 듯 눈 질끈 감으며 인사했다. 짐 아저씨는 만날 때마다 '슬렌체(건배)' 같은 스코틀랜드 고유 게일어(語)를 외치며 주먹을 흔들었다. 우직하고 거친 3000명, 이들은 그 자체로 아일라였다.

◇에필로그: 오직 지구에서만, "슬렌체!"

아드벡은 2014년 미 항공우주국(NASA)과 함께 중력이 위스키 맛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한 실험을 했다. 국제우주정거장과 지구에서 위스키 원액을 똑같은 참나무통에 각각 2년 6개월여 숙성하고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했다. 결과는 만장일치. '맛이 다르다'였다. 중력·바람·바다·인간이 만든 우주에서 가장 맛난 술! 이 행성에서 살아갈 근사한 이유 아닌가. 서울로 돌아와 아일라에서 가져온 보모어 위스키를 한잔 물었다. 이 위스키를 만든 사람 중 몇 명은 오래전 세상을 떴을지 모른다. 초(超)스피드를 이야기하는 시대이지만 혁신은 오로지 빠름 속에만 있을까. 짐 아저씨의 말이 떠올랐다. "15년산 위스키가 완성되려면 15년이 흐르는 수밖에 없어. 그 시간을 줄일 방법이 있는가? 세상이 바뀌었다는 말, 나는 안 믿어. 슬렌체!"

[아일라 위스키 매력의 완성 '피트'향… 옥토모어 가장 짙고 브뤽라디 가장 약해]

스코틀랜드 아일라산 위스키의 매력으로 짙은 연기 향을 꼽는 이들이 많다. '피트(peat)'라는 탄(炭) 덕분인데, 피트를 태워서 보리를 건조시키면 특유의 향이 나온다. 아일라섬 전체를 뒤덮고 있는 피트는 해초·물이끼와 섬 야생화 등이 수천년에 걸쳐 산소가 거의 없는 땅 아래서 부식해 만들어진다. 아일라 위스키 증류소 8곳에서 생산되는 위스키는 ppm(농도를 나타내는 단위)으로 표기되는 피트향의 강도(强度)에 따라 분류된다. ppm이 높을수록 피트향이 강하단 뜻이다. 최근엔 피트 없이 좋은 보리와 잘 준비한 참나무통만으로 '아일라의 맛'을 내는 증류소도 나왔다. 브뤽라디 증류소는 2001년부터 언피티드(unpeated·피트를 안 쓴) 위스키를 만들기 시작했고 브나해븐도 언피티드 위스키를 판다.

[미탐100 다녀왔습니다] 최고 위스키 만드는 건 결국 환경을 사랑하는 사람

기후와 환경이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심이 많은 스물다섯 살 김종언입니다. 대학에서 기후경제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기후 환경 NGO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환경을 공부하면 할 수록 스코틀랜드 아일라섬은 미스터리였습니다. 전 세계 위스키 시장을 석권하면서도 동시에 자연환경을 지켜나갈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환경을 존중하고 공존하는 삶이 훌륭한 위스키를 만든다는 강한 공감대가 있었습니다. 위스키 성공의 모태(母胎)는 자연환경이라는 확신 말입니다. 이를 위해 일상의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했습니다. 대부분의 도로가 1~2차로에 불과했고, 주문이 밀려 들어와도 생산량을 함부로 늘리지 않았습니다.

탐험을 떠나기 전 아일라 위스키가 가진 '환경적 비밀'을 찾아오리라 다짐했지만 다녀와서는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환경 그 자체보다 중요한 건 환경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정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