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로 만화를 그리는 작가가 있다. 행위예술이나 퍼포먼스라고 착각하지 말 것. 손가락의 퇴행성 관절염이 악화해 칫솔을 쥐기도 어려운 상황에 빠졌기 때문이다. 손이 아프자 처음에는 발 마우스, 펜 타입 마우스, 스타일러스, 한 손 키보드 등 온갖 종류의 입력 장치를 바꿔가며 그렸다. 그나마도 손이 아파 불가능한 상황이 되자 아예 목소리로 컴퓨터에 명령하기 시작했다. 작가의 이름은 천계영. 순정만화 독자들에게 90년대 히트했던 작가의 만화 '언플러그드 보이'와 '오디션'은 전설이다. 2014년부터 6년째 연재 중인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은 다음 웹툰 랭킹 1위를 놓치지 않으며 넷플릭스에서 드라마로 제작돼 곧 공개된다.
지난 3일 천계영 작가가 음성 명령으로 웹툰을 그리는 과정을 유튜브로 생중계했다. 지난해 3월 11일 '좋아하면 울리는' 연재를 건강 문제로 쉰다고 알린 지 1년 3개월여 만이다. 작가는 "많은 노력에도 일할 수 있는 손가락을 되찾지 못했다"며 "마우스 클릭을 할수록 연골이 닳아서 손가락을 아껴야 한다"고 현 상태를 밝혔다. 600명의 독자가 작가의 생중계를 지켜봤다.
"프레임(frame) 한 개." 작가가 마이크에 대고 컴퓨터에 명령하자, 흰 창 위에 만화 한 컷이 들어갈 수 있는 칸이 생겼다. "왼쪽 말 칸." 왼쪽이 삐져나온 말풍선이 화면에 떴다. "크게" 말풍선이 커졌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마법 주문이 아니다. 작가가 만화에 필요한 작업들을 하나하나 정리해 음성 명령어와 연결해 놓은 결과다. "봉식이 찾아줘." 3차원으로 모델링(mod eling)해 놓은 남자 캐릭터 '봉식이'가 주르륵 나왔다. 앉아 있는 자세의 캐릭터를 고른 작가가 캐릭터의 고개 각도를 조정해 턱을 내린다. 만족한 작가는 캐릭터를 웹툰에 넣기 전 다시 명령한다. "그려줘." 3차원 캐릭터가 독자들에게 익숙한 2차원 만화 캐릭터로 그려진다.
목소리로 그리는 작업은 반복에 반복이었다. "더 크게." 말풍선을 키우는 명령어가 통하지 않았다. "'더 크게'가 아니라 '크게'인가?" 몇 번 '크게'와 '더 크게'를 반복하다 보니 말풍선이 커졌다. "'크게'구나. 미안." 작가는 컴퓨터에 사과했다. "명령어가 너무 많아 다 외우지 못했어요." 설상가상으로 컴퓨터의 음성 인식 기술이 아직 완전하지 않아 명령이 잘 인식되지 않았다. 말풍선 하나에 들어갈 대사를 쓰고 말풍선 모양과 위치를 정하는 데만 2분 30초가 넘게 걸렸다. 손만 건강하다면 마우스 클릭 몇 번이면 끝날 분량이었다. 생방송을 보던 독자들은 "컴퓨터야, 작가님 말 좀 들어라" "내 손을 작가님께 드리고 싶다" 등의 댓글을 실시간으로 달며 함께 답답해했다.
작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연재를 오래 쉬었고 원고를 마무리하지 못한 상황이라 개인 인터뷰하는 게 만화 독자들에게 죄송하다"며 고사했다. 작가는 "독자들에게 힘을 얻어 다음 원고를 열심히 하려고 이 방송을 한다. 여러분의 응원이 무척 필요한 시기"라고 유튜브를 통해 밝혔다. 목소리로 그린 '좋아하면 울리는'의 연재 일정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작가는 "빨리 작업해서 8월 중 나오는 넷플릭스 드라마보다 먼저 결말을 보여 드리는 게 목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