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내에서 버스로 15분 떨어진 마을 '더쾨벌(De Ceuvel)'은 아담한 항구 도시처럼 보였다. 마을 초입을 지나자 선상(船上) 가옥 10여채가 보였다. 이 배들은 그러나 물 위에 떠 있지 않았다. 마을 골목을 따라 땅 위에 늘어 서 있었다. 배 안을 들여다보자 컴퓨터 앞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더쾨벌에서 우리를 안내해준 마크 더훕씨는 "조선소가 버리고 간 오염된 땅을 주민들이 손수 이렇게 부활시켰다"며 "상당히 인기 있는 관광 명소"라고 말했다.
나는 부산 광안리에 산 적이 있다. 요즘 그 동네 여러 건물엔 재개발에 반대하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높은 새 건물이 들어오며 아파트 창문을 막자 원래 살던 이들의 불만이 높아진 것이다. 나는 궁금했다. 재개발이란 '그 동네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얼마 전 들은 수업 때 네덜란드의 도시 재생 이야기를 배웠다. 낡은 지역을 바꾸거나 다시 디자인할 때 결정하고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대부분 시민이라고 했다. 시민이 손수 바꿔가는 도시를 찾아갔다.
◇조선소 폐업 후 버려진 땅을 살리다
더쾨벌은 시민 주도형 도시 리모델링의 대표 성공 사례로 손꼽힌다. 조선사인 쾨벌-보할딩이 2000년대 초 경영난으로 폐업한 뒤, 이 지역은 10년간 폐허로 방치됐다. 땅은 정부 소유였는데 80년 동안 조선소로 쓰여 기름에 찌들어 있었다. 주민들이 민원을 넣었지만 재정난에 시달리던 정부엔 문제 해결 여력이 없었다. "정부는 땅을 공짜로 줄 테니 이를 좀 고칠 이들이 없는지 물색했고, '스페이스&매터'라는 건축회사가 선정됐습니다. 1250㎡짜리 공간을 완전히 새로 만들라면서 정부가 준 돈은 달랑 25만유로(약 3억2000만원)에 불과했지요." 더쾨벌 재생에 참여한 건축가 톰 반알만씨가 설명했다.
집 한 채 짓기에도 모자란 돈으로 망가진 땅을 바꿔야 했다. 이 어려운 프로젝트를 위해 지역 주민들이 기꺼이 공짜 노동력을 제공하기로 했다. 버려진 배를 벤치로 꾸미거나 페인트를 칠하는 등 자원봉사를 하러 몰려왔다. 낡은 선상 가옥을 가져다 고쳐 쓰자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나왔다. 배를 가져다 땅으로 옮길 땐 시민 수백명이 나와 밧줄을 당겼다. 16개 개성 있는 '배(船) 사무실'은 2014년 완성됐다. 사무실 임차료는 1㎡당 65유로(연간)에 불과하다. 수익금은 개발 과정에서 빌린 은행 돈을 갚아나가는 데 쓰인다.
◇시민이 만드는 거대한 실험실
이 마을은 '완성'된 후에도 주변에 사는 시민과 '리모델링한 배'에 저렴하게 입주한 회사(스타트업 등)의 직원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예컨대 더쾨벌을 둘러보러 오는 관광객을 안내하는 일이나 골목 청소, 주말 장터 운영 등이 이들의 무급 봉사로 이뤄진다. 더훕씨는 "더쾨벌 내 회사로 출근하는 사람들은 일주일에 최소 4시간씩 마을을 위해 시간을 쓴다"고 했다.
주민들은 더쾨벌을 이른바 리빙랩(living lab)으로도 활용 중이다. 리빙랩은 시민들이 생활하면서 지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시도해보는 공간을 뜻한다. 더쾨벌에서 이뤄지는 실험은 '에너지가 순환하는 친환경 도시'다. 예컨대 카페에서 쓰는 채소들은 마을에 있는 온실 2층에서 직접 기르는데 화분에 준 물이 아래층 수조로 내려가 물고기를 기르는 데 다시 쓰이는 식이다.
더쾨벌뿐이 아니었다. 암스테르담 시민들은 직접 팔을 걷어붙여 도시를 고쳤다는 자랑을 여럿 들려줬다. 예를 들어 마약과 범죄가 만연하던 하를럼(Haarlem) 거리는 지역 주민 넬 더야허르 주도로 개성 넘치는 쇼핑 거리로 바뀌었다. 20년에 걸쳐, 주민들은 거리를 청소하고 저렴한 임차료를 내세워 직접 다른 지역에 있는 재밌는 상점을 유치했다고 한다. 허물어질 위기였던 낡은 트램 차고지였던 더할런(De Hallen)은 지역 주민과 도시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호텔·도서관·공유사무실 등이 들어선 문화 공간으로 바꿨다. 우리가 암스테르담을 찾은 지난달엔 '위메이크더시티(We Make the City·도시는 우리가 만든다)'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시민들이 소개한 도시 개선 사례만 200개가 넘었다.
이들은 왜 자기 돈과 시간을 들여 도시를 바꾸려 할까. 미국 출신 반알만씨는 "미국인은 각자, 한국인은 위계질서에 의해, 네덜란드인은 다 함께 일하는 문화가 있는 듯하다"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축제를 주관한 '암스테르담 스마트시티' 프란스-안톤 베르마스트 전략고문은 말했다. "정치적 고려나 명분을 따질 필요 없이, 도시를 개선하고자 가장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이 누구일까요. '내가 사는 동네'를 좋게 만들겠다는 시민의 의지를 그 누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빗물 맥주·옥상 정원… 네덜란드에선 상상이 현실로]
네덜란드엔 '암스테르담 스마트시티(Amsterdam Smart City, ASC)'란 비영리 재단이 있다. 시민들이 도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직접 제안하면 기업, 전문가, 지역 주민, 공무원 등이 팀을 꾸려 도시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도록 연결해주는 플랫폼이다. 지금까지 7000명 가까운 사람이 참여해 약 200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재밌는 프로젝트 몇 개를 소개한다.
◇빗물로 맥주를 만들자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맥주를 만들면 어떨까. 암스테르담은 강수량이 적지 않다. 도시 곳곳에 빗물을 모으는 장치를 설치한 후 이를 모아 정수 처리해 맥주를 만들자는 프로젝트다. 실제로 이 아이디어가 실현돼 2016년 '빗물 맥주〈사진〉'가 탄생했다. 이제 비 오는 날이면 막걸리가 아니라 맥주가 생각날 것 같다.
◇스마트 시티즌 키트
지금까지는 정부나 전문가들이 직접 공기 질(質) 같은 환경 지표를 측정해왔는데, 사람들에게 '스마트 시티즌 키트'라는 작은 전자 기기를 나눠줘 집 주변 습도, 소음 공해, 온도, 일산화탄소, 이산화질소 등을 측정하게 하자는 아이디어다. 옥외 난간이나 집 앞 나무 등에 키트를 묶어두면 데이터가 측정된다. 데이터는 지도와 함께 온라인으로 공유된다. 시민 모두가 환경 문제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하자는 방안이다.
◇옥상 정원 만들기
네덜란드엔 평평한 옥상이 있는 집이 많다. 2020년까지 이 옥상의 10%를 녹지로 바꾸고자 하는 프로젝트다. 더 나아가 방치되는 옥상 공간이 아예 없도록 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2016년 4월 이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후로 시민들이 옥상 140곳을 녹지로 바꾸겠다고 신청했다. 네덜란드 3개 도시에 1만4000㎡의 옥상 정원이 생겼다.
◇나무 와이파이
대기 오염을 흔히 '침묵의 살인자'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대기 오염 방지에 나서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가로수나 정원의 나무에 '스마트 새집'을 설치하도록 해 대기 오염 정도를 측정하자는 제안이다. 새집이 있는 거리에 공기가 깨끗해지면 지붕에 초록 불이 들어온다. 초록 불이 들어오면 새집은 와이파이 생성 기능이 켜지고 주변 사람들은 무료로 와이파이를 쓸 수 있다. 시민에게 공기를 깨끗하게 바꾸자는 동기를 부여하는 동시에 공짜 와이파이도 제공하자는 아이디어다.
[미탐 100 다녀왔습니다] "시민들이 팔 걷고 나서는 '한국형 리빙랩' 언젠가 완성되겠죠"
도시 문제 해결은 전문가의 영역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손을 댔음에도 도시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더 꼬이는 일을 종종 봅니다. 얼마 전 대학 교양과목의 하나로 '일반 시민 관점에서 사회문제 개선점 찾기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수업을 하다 보니, 세계 각국 시민들이 사회문제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특히 네덜란드 '리빙랩'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시민 전체가 자발적으로 자기 도시의 문제 해결에 참여하는 리빙랩은 시민 참여도가 핵심입니다. 네덜란드는 어떻게 시민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일주일간 탐험 후 그 비결은 '협력의 문화'에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네덜란드 사람 중엔 시민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금전적인 대가가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본인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는 이가 많았습니다. 그렇게 힘을 모아 도시 문제를 풀어내고, 그 성공 경험을 마중물 삼아 또 다른 참여로 이어나갔습니다.
우리는 아직 이런 문화가 걸음마 수준입니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작은 성공의 경험을 꾸준히 쌓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한국형 리빙랩'을 완성해낼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보탬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