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전에 가깝게 조도가 낮은 무대엔 푸른빛 알전구를 단 보면대 6대만 일렬로 놓였다. 오보이스트 함경(26), 클라리네티스트 김한(23), 플루티스트 조성현(29)은 백스테이지에서부터 악기를 불면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한 악기가 서정적인 선율을 잔잔히 연주하면 다른 두 악기는 한 음을 길게 끌었다. 러시아 작곡가 로디온 셰드린(87)이 어릴 적 개울가에서 들려오던 소리를 떠올리며 쓴 '세 목동'(1988)이다. 오카강 끄트머리에서 양을 치던 목동들이 저마다 노래를 흥얼거리는 풍경이 곡의 배경이다.

지난달 31일 밤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리조트 내 콘서트홀에서 막 올린 제16회 평창대관령음악제(예술감독 손열음)는 개막 공연 '옛날 옛적에'의 첫 순서로 목관을 든, 세 명의 목동을 내보냈다. 플루트와 오보에, 클라리넷 등 목관만 한데 묶은 삼중주는 클래식 곡 중에서도 드물고, 셰드린은 현대음악 작곡가답게 악보에 마디를 나누지 않았다. 그럼에도 세 악기가 동시에 불어야 하는 음은 점선으로 이어놓아서 이 세 연주자는 악보도 같이 봐야 했다.

지난달 31일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리조트에서 클라리네티스트 김한, 오보이스트 함경, 플루티스트 조성현(왼쪽부터)이 소낙비가 훑고 지나간 스키 슬로프에 섰다. 숨으로 악기를 조련하는 이들에게 맑은 공기, 선선한 바람은 “그야말로 천국”이라 했다.

클래식 본고장인 유럽에서 '동양인은 관악기를 못 분다'는 편견을 조성현과 함경, 김한은 실력으로 깨뜨렸다. 조성현은 독일 쾰른의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에서 종신 플루트 수석. 함경과 김한은 지난해 9월 핀란드 방송교향악단의 오보에와 클라리넷 부수석이 됐다. 2012년부터 목관 앙상블 '파이츠 퀸텟'의 멤버로도 의기투합한 셋에게 '세 목동'은 "할 때마다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곡"이다. 조성현은 "5년 전 뮌헨에서 만난 셰드린이 악보에 사인까지 해 선물로 줬다"고 했다. 악기마다 조성이 달라 얼핏 들으면 불협화음인데, 뭉치면 소박하면서도 내향적인 분위기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개막 당일 대관령엔 먹구름이 끼었다. 쏴아, 세찬 비가 멈추자 흙에선 풀 냄새가 났다. 산천초목과 들꽃으로 덮인 스키 슬로프, 풍성한 음악이 피로를 씻어줬다.

화전(火田)의 땅, 이효석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였던 평창은 해발 700m 대관령에 있다. 한여름에도 평균 기온이 21.9도에 머물러 음악을 하기에 딱 좋지만 관악 주자들에겐 다소 버거운 지대다. 높은 산에 오르면 숨이 헉헉 차듯 대관령에선 숨도 더 세게 불어야 하고, 서울에선 멀쩡했던 대나무 리드(reed)도 이상한 소리를 낸다. 오보에 특성상 칼과 사포로 리드를 직접 깎아 만들어야 하는 함경은 평창에 도착하자마자 리드 50개를 호텔 방에 펼쳐 놓고 일일이 끼워 불어봐야 했다.

이날 개막 공연은 바이올린의 스베틀린 루세브와 비올라의 가레스 루브, 첼로의 율리안 슈테켈, 더블 베이스의 미치노리 분야, 피아노의 김선욱이 함께한 슈베르트 피아노 오중주 '송어'가 장식했다. 베토벤이 20년 동안 나눠 쓴 첼로 소나타 1~5번을 하룻밤에 들을 수 있는 '그래야만 하는가?',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는 '집으로, 두 번째 이야기' 등 음악제는 오는 10일까지 계속된다. (033)240-13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