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당나라 수도 장안(長安·현재의 시안)성은 발해의 상경(上京), 일본 나라시대 헤이조쿄(平城京)의 모델이 됐을 만큼 중원 왕조의 전형적 도성(都城)으로 알려져왔다. 중앙 대로를 중심으로 바둑판처럼 나뉜 구역 안에 주민들이 사는 집과 시장이 있었다. 중국 중세사 연구자 박한제(74) 서울대 명예교수는 중원 왕조의 대표적 도성인 장안성이 한족 고유의 전통에 오랑캐[胡族]로 불리던 유목민족의 영향이 뒤섞인 '호한체제(胡漢體制)'적 성격이 강하다고 주장한다. 이번 주 나온 '중국 중세도성과 호한체제' '중국 도성 건설과 입지'(이상 서울대출판문화원) 연구서 두 권을 통해서다.
'호한체제'는 저자가 중국 중세를 이해하는 패러다임으로 제시한 독창적 용어로 중국과 일본 학계에서도 주목받았다. 3세기 후한 말 이후 서북방 유목민족이 중원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오랜 기간에 걸쳐 농경 한족과 충돌·반복·융합했고 수·당(隋唐) 제국은 그 통합의 결과라는 이론이다. 당은 한족 국가로 알려졌지만 '오랑캐'인 선비족 일파인 탁발족이 세운 국가이고, 수·당 황제들은 혈통으로 따져볼 때 70% 이상은 호족(胡族)의 피가 섞였다고 한다.
저자는 수·당 시대 도읍인 장안성을 '호한체제'가 실현된 모델로 설명한다. 장안성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대형 성곽 도시였고 ▷궁성이 성의 북쪽에 치우쳐 있으며 금원(禁苑)이 궁성과 연결돼 있고 ▷도성 안을 가축우리처럼 담장으로 구분, 주민을 가축처럼 일사불란하게 통제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유목 민족 특성이 반영된 결과라는 것이다.
유목 민족은 본래 이동식 주거 관념을 지녔지만 중원으로 진출하면서 전쟁 포로와 기술자들을 한곳에 가둬 관리하며 생산에 종사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성곽을 짓게 됐다. 한때 적이었던 포로·기술자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구역 안에 수용했고, 이런 적대적 인민에게 포위당하는 걸 막기 위해 황제가 사는 궁성은 도성 북쪽에 자리 잡게 됐다는 것이다. 이로써 궁궐은 도성 중앙에 자리 잡아야 한다는 한족(漢族) 전통에서 벗어나게 됐다.
궁성 뒤쪽엔 넓은 '후원'이 있었는데, 이곳은 황제의 신변 안전을 위해 군대가 주둔하며 훈련장으로 썼다. 유목 민족 특성이 강하게 남은 후원은 반란 때 황제의 피란 공간이자 군대를 이끌고 정벌에 나설 때 출발점이 됐다. 그 결과, 후원과 궁성을 연결하는 '북문'(현무문)은 당 태종의 '현무문의 변'처럼 정권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장소가 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