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조선일보 100년 포럼 고문인 이어령 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을 인터뷰했다. 한국 문화의 발전상과 미래 비전에 대한 이 고문의 인터뷰 내용을 요약했다.

지난 100년 우리 문화의 동력을 얘기하려면 지정학적 위치에 대한 언급을 빼놓을 수 없다. 우리는 대륙과 연결되고,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半島)에 살았다. 근대화 이전까지는 줄곧 대륙의 영향을 받았다. 서양 문물도 실크로드를 통해 육로로 들어왔다. 호박·호두·후추에서 호마(胡馬)·호주머니 등에 붙어 있는 '호(胡)'라는 말이 바로 이런 대륙 문화의 흔적이다.

이어령 조선일보 100년 포럼 고문이 지난달 말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다음 100년 한국 문화의 비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는 "지난 100년 우리 문화 발전은 해양 문화를 받아들인 데서 나왔지만, 다음 100년은 지금껏 버려둔 토박이 문화에서 창조성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지난 100년 우리 문화 발전의 힘은 바다에서 나왔다. 불행하게도 일본의 지배를 받았지만, 그 시기에 비로소 해양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에서 보듯 개화기 소년 잡지엔 바다 이야기가 넘쳤다. '호'와 대비되는 말이 '양(洋)'이다. 양복·양옥·양말·양산 등 일용품에서 양곡(洋曲)·양화(洋畫) 같은 문화예술까지 양자 붙은 말이 쏟아졌다. 심지어 전쟁도 호란(胡亂)에서 양요(洋擾)로 바뀌지 않았나.

과거엔 대륙의 말힘[馬力]에 의존했지만, 개화기 이후엔 배[船]에서 한국 문화의 힘이 나왔다. 같은 대포라도 땅에서 말이 끄는 것보다, 배에 실으면 그 위력이 몇 배가 된다. 경제적으로도 배로 물건을 실어오는 게 훨씬 저렴하다. 해방 이후 해양 문화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무역을 하고, 글로벌화에 성공했다. 지금 한류(韓流)가 세계에서 통할 수 있는 것도 100년 전 해양 문화를 받아들인 덕분이다.

지난 100년간 해양 문화로 발전했다면, 다음 100년의 힘은 '호'의 대륙 문화와 '양'으로 상징되는 해양 문화에서 소외됐던 우리 고유의 '막 문화'에서 나올 것이다.

창조는 모순을 융합해 새것을 만드는 일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아이가 방에서 공부하는데 아버지가 "더우니 창문 열고 해"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머니는 "모기 들어오니 창문을 닫아라"고 한다. 아이는 창문을 여느냐, 닫느냐는 양자 선택을 놓고 고민한다. 지금까지 한국의 정치·경제 현실은 이랬다. 강한 쪽의 말을 따르려니 눈치를 보고, 줄 서기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창조성을 발휘한다면 어느 한쪽을 따르지 않고, 창문에 방충망을 다는 새로운 해법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흔히 "버려둬"라고 말한다. 버리는데 그냥 놔둔다는 이 모순 속에 바로 해답이 있다.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변증법에서 제시한 '아우프헤벤(aufhe ben)'이라는 개념이다. 우리나라에선 세 살짜리도 "버려둬"라고 말한다. 밥이 잘되거나 타서 못 먹게 되거나 둘 중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탄 밥도 누룽지로 만들어 먹는 게 한국인이다.

이미 알려진 약초 밭은 사람들의 손을 타서 약초가 남아 있지 않다. 지금껏 억압되고, 잊혔던 우리의 토박이 문화에 미래의 힘이 있다. 한자로 쓰면 잡(雜)이고, 우리말로 부르면 '막 문화'이다. 막사발, 막걸리, 막춤 등이 해외로 나가 중국의 대륙 문화에서도 서양의 해양 문화에서도 볼 수 없었던 한국 특유의 생명력과 독창성을 발휘한다. 싸이의 말춤, 세계가 열광하는 BTS의 몸짓은 달리는 관광버스에서도 춤을 추는 우리의 막춤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막 문화의 바탕에는 쑥과 달래, 마늘을 캐 먹는 웅녀의 원형인 '나물 먹는 채집 문화'가 있다. 정보 시대에도 여전히 우리는 정보를 "캔다"고 말하고, 호미가 지금 세계의 각광을 받는다. 채집인들은 풀을 캐고 열매를 딸 때마다 그것이 먹을 수 있는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냄새 맡고 씹어본다. 인터넷 빅데이터에서 쓸모 있는 정보를 '캐내는 것'도 이 채집 문화와 통한다. 채집인들은 정보를 단순히 소비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판단하고 찾아내면서 창의성을 축적해 간다.

지금 우리는 중국으로 대표되는 대륙 세력과 미국으로 상징되는 해양 세력이 격돌하는 현장에 있다. 다음 100년 '버려둔 막 문화'를 창조의 자원으로 삼아 글로벌한 새 문명의 지렛대와 화살표로 삼아야 한다. 막 문화가 그동안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했던 반도의 지정학적 의미를 앞으로 올 생명화 시대의 창의력으로 바꿔줄 동력이 될 것이다. 21세기는 농경화, 산업화, 정보화에서 다시 채집 시대적 자연과 생명력을 바탕으로 한 생명화 시대로 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