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매운동에 올 추석엔 한국형 화투 '韓투' 관심
화투 '쌍피'엔 라쇼몽(羅生門), '비광'엔 日 서예가
한글 새기고 우리 민화로 다시 그린 '한투'

바닥에 패를 붙이는 소리가 ‘짝, 짝’ 하고 방 안에 경쾌하게 퍼진다.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은 이불 주위를 빙 둘러앉아 빨간 플라스틱 패를 분주히 부딪힌다. 알록달록한 패가 ‘착’하고 젖혀질 때마다 탄식과 환호가 뒤섞인다. 화투(花鬪) 놀이를 즐기는 흔한 우리네 추석 명절 풍경이다.

그러나 올 추석 연휴엔 이 풍경이 조금은 바뀔지도 모르겠다. 지난 7월부터 시작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의 여파로 일본색(色)이 짙은 기존 화투 대신 ‘한국형 화투’가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형 화투에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그림 대신 익숙한 우리 민화(民畫)가 새겨지고, 한자 대신 한글이 쓰인다.

일러스트=정다운

◇한국인도 잘 모르는 화투의 비밀
우리나라에서 '민속놀이'처럼 자리 잡은 화투는 본래 일본에서 건너왔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쯤 일본의 전통놀이인 '하나후다(花札·화찰)'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이 그 시초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하나후다는 현재 정작 일본에서는 거의 없어진 놀이다. 국내에선 1980년대까지만 해도 종이로 만들어진 화투가 쓰였지만, 그즈음 화투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내구성이 강한 플라스틱 소재로 바뀌기 시작했다고 한다.

화투패는 총 48장으로 이뤄져 있다. 4장이 한 짝이 되고, 짝들은 각각 1년 12달을 상징한다. △1월은 소나무(松鶴) △2월 매화와 새(梅鳥) △3월 벚꽃 △4월 흑싸리 △5월 난초(蘭草) △6월 모란(牡丹) △7월 홍싸리 △8월 공산(空山·공산명월) △9월 국준(菊俊) △10월 단풍(丹楓) △11월 오동(梧桐) △12월 비(雨)가 그려져 있다.

기존 화투패의 모습.

놀이의 뿌리가 이렇다 보니, 화투패의 그림 소재에는 일본의 문화가 강하게 배어 있다. 일본에서 문헌학 박사 학위를 받은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교수는 패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청단’과 ‘홍단’의 유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홍단과 청단은 일본 하나후다의 ‘적단책’ ‘청단책’을 그대로 가져온 것인데, 단책(短冊·단자쿠)은 본래 일본 전통 시가를 적을 수 있게 만든 종이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칠월칠석이 되면 이 ‘단자쿠’에 소원을 적어 대나무에 걸어놓는 풍습이 있어요."

이외에도 9월 패에는 일본 황실가(家)를 상징하는 ‘국화’가 쓰였고, 흔히 ‘똥’이라 불리는 11월 패에는 현(現) 일본 정부의 문양으로도 사용되는 ‘오동나무’가 새겨 있다. 12월 패 중 ‘쌍피’라고 불리는 패에는 일본에서 흔히 ‘저승으로 가는 문’으로 통용되는 ‘라쇼몽(羅生門)’이 그려져 있다. 또 ‘비광’의 우산을 든 캐릭터는 일본의 3대 서예가 중 한 사람인 오노노 도후(小野東風·894~966)를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재뿐만 아니라 화풍(畫風)도 일본 전통 화풍에서 비롯됐다. 김 교수는 "일본 에도 시대 풍속화에 주로 쓰인 우키요에(浮世繪) 화풍 특유의 ‘쨍한’ 느낌이 화투 그림에도 잘 반영돼있다"고 설명했다.

◇'우리 민속 풍경' 넣은 한국형 화투…"'NO재팬' 이후 문의 늘어"
화투는 어떻게 '한국형'으로 탈바꿈했을까. 2017년 처음 선보인 '투화'는 단순한 일본풍의 그림 대신 전통 민화와 궁중화를 이용해 화투패를 새로 디자인했다. 우리 정서에 맞지 않는 '라쇼몽'을 조선 후기 작품인 '감모여재도(感慕如在圖)' 속 사당으로 대체하고, 새까맣게 칠해져 형체를 알 수 없는 버드나무는 연두색을 입힌 부드러운 느낌의 우리 민화풍으로 다시 그리는 식이다.

일반 ‘비광’ 화투(왼쪽 상단)을 한국 전통 민화로 재구성해 만든 화투패.

2017년 만들어진 ‘청실홍실 우리화투’는 기존 열두 달 그림을 한국의 민속 풍경으로 대체했다. 1월은 백두산 천지에서 색동옷을 입은 어린이가 세배하는 모습을, 8월은 ‘한가위’라는 한글과 함께 강강수월래·무궁화 그림을, 가을인 10월은 말과 단풍을 그렸고, 욱일기를 연상케 하는 기존 ‘光(광)’ 표시는 ‘福(복)’으로 대체했다. 열두 달을 상징하는 한국 화초들과 이에 얽힌 설화의 한 장면을 넣은 화투도 있다. 2011년 ‘시옷’이 만든 ‘열두달 소담패’다. 2014년에는 아예 그림을 빼고 한글로만 이루어진 화투 ‘열두달 한글패’를 만들기도 했다. 2006년 ‘한투’를 만든 ㈜성융의 패 그림도 한국의 미풍양속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최근 일본 제품 불매운동의 영향으로 일본 문화 영향이 짙은 기존의 화투 대신 이같은 한국형 화투를 찾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는 추세다. 세련된 디자인도 인기에 한몫하고 있다. 한국형 화투가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시점은 2000년대 중반 무렵. 개발 초창기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0여 년 만에 때아닌 특수를 누리게 된 셈이다.

여러 가지 한국형 화투의 모습. 한국 민화를 바탕으로 화투를 재구성한 ‘투화’(위쪽)와 한국 화초와 설화를 바탕으로 디자인한 ‘열두달 소담패’(아래쪽)의 모습.

‘투화’를 디자인한 노경선(38) 작가는 "한·일 관계 문제가 불거지면서 최근 매출이 늘어나는 등 대중이 투화 작업을 다시 의미 있게 봐주시는 것 같다"면서 "기업 제작·강연 의뢰가 들어오기도 하고, 온·오프라인을 통해 활발히 판매되고 있다"고 했다. 소담패와 한글패를 만든 김민선(35) ‘시옷’ 대표도 "추석 시즌까지 겹쳐 평소보다 판매량이 다소 늘었다"고 말했다.

주부 박모(42)씨는 "평소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실천하고 있었다"면서 "좀 유난스러워 보일지는 몰라도 이번 기회에 디자인도 예쁜 한국형 화투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주문해봤다"고 말했다. 대학생 강경민(25)씨는 "명절이면 가족들이 모여 자주 화투를 치곤 했는데, 화투에 일본 문화가 많이 녹아 있다는 사실을 접하고 큰집에 내려가기 전에 하나 구입했다"고 했다.

김 교수는 "‘한국형 화투’가 생겨나는 등 일종의 변형을 보이는 것 자체가 화투란 놀이는 이미 우리나라 성질에 맞게 상당히 뿌리를 내렸다는 뜻"이라며 "일본에서 온 화투가 정작 일본에선 특수 계층에만 겨우 남은 놀이가 되고 현지화를 거친 한국에선 완전히 꽃을 피운 것처럼, 우리식으로 변화하려는 지금의 노력도 대중화, 나아가 세계화까지도 이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본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