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는 언제나 우울한 방문객, 어두운 음계(音階)를 밟으며 불길한 그림자를 이끌고 오지만, 자네는 나의 오랜 친구이기에 나는 자네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동안을 뉘우치게 되네."
지난 20일(현지 시각) 뉴욕 맨해튼 예일 클럽에서 조지훈(1920~1968)의 시 '병에게'를 낭독하는 조태열(63) 유엔 주재 한국 대사의 표정은 감개가 무량한 듯 보였다. 이날 낭독회는 한국을 대표하는 '청록파' 조지훈 시인의 영문 시집 'Shedding of the Petals(낙화)' 출간을 기념하기 위해 열렸다. 조 시인의 시는 프랑스어로 번역이 된 적은 있지만, 영어로 번역된 시집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출판·낭독회에는 조 시인의 장남인 재미(在美) 건축가 겸 수필가 조광렬(74)씨와 3남인 조태열 유엔 주재 한국 대사가 참석해 '낙화' '병에게(To My Illness)' '절정(The Vertex)' '완화삼(Petals on the Sleeves)' '고사(古寺·An Ancient Temple)' 등을 각각 영어와 한국어로 번갈아 낭독했다.
이번 영문 번역 시집은 고(故) 이인수(1916~1950) 고려대 영문과 교수 부자(父子)의 2대(代)에 걸친 노력이 있었기에 빛을 볼 수 있었다. 조 시인과 친구 사이였던 이 교수는 조 시인에게 그의 시를 영어로 번역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낙화'와 '산방(Mountain Lodge)' 두 편을 번역한 뒤 1950년 사망했다. 그 뒤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아들인 이성일(75) 연세대 영문과 명예교수가 조 시인의 시 80여 편을 번역했다. 영문판 시집이 나오기까지 약 7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하지만 조 시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승무'는 빠졌다. 조태열 대사는 "(얇은 사(紗)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같은 구절을 '버터플라이(butterfly)'라고 번역할 수도 없고 참 난감하지 않았겠느냐"면서 "그만큼 아버지의 시에 나타난 한국적 정서를 영어로 옮기는 게 어렵다는 걸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조 대사는 "오늘 내가 낭송했던 '병에게'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약 석 달 전에 쓰신 마지막 시다. 당시 나는 열세 살이었는데 아버지가 이 시를 읽어 주셨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지금도 이 시를 읽으면 눈물이 난다"고 했다.
약 4000명의 회원을 둔 '코리안 아트 소사이어티(Korean Art Society)'의 창립자이자 회장인 로버트 털리는 "조지훈의 시는 다양한 주제에 대한 조용한 사색을 담고 있는 데다, '목어를 두드리다 졸음에 겨워 고오운 상좌 아이도 잠이 들었다('고사'의 일부)' 같은 구절을 낭독할 때면 한국어를 몰라도 특유의 음악성(musicality)이 느껴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