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제주는 태풍으로 종일 앓았고, 제주 화가 강요배(67)씨는 "태풍 앞에서 부실한 것들은 꺾이거나 찢기거나 쓸려나간다"고 했다. 그리고 "이중섭처럼 공부한 바를 스스로 체화하지 않는다면 한국 미술도 금세 쓸려나갈 것"이라고 했다. 23일 서귀포 KAL호텔에서 열린 '2019 이중섭과 서귀포' 세미나에서는 이례적으로 매서운 질타가 몰아쳤다.

23일 열린 '2019 이중섭과 서귀포' 세미나에서 강요배 화가가 자신의 최신작 '정방폭포'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외국 사조에 파묻히지 않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지킨 이중섭과 같은 화가들의 정신이 재조명돼야 한다”고 말했다.

2015년 이중섭 미술상 수상자인 강씨는 이날 "지금 우리 미술은 자기 정신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일갈했다. "1951년 이중섭이 제주도로 피란 온 해 나는 제주도 갯마을의 어머니 배 속에 있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중섭의 그림은 황혼녘에 울부짖는 '황소'나 추상으로 나아가는 '봉황'에서 보이듯 색과 붓자국의 운용이 상당히 동양적이다. 이중섭 탄생 100년이 지났다. 누구도 더는 '서양차(車)'라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이중섭 그림 역시 '서양화(畵)'의 개념에 가둘 필요가 없다. 일본에서 공부했으나 외래의 화풍에 매몰되지 않았던 그의 그림을 우리의 전통으로 새롭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비판은 '이중섭미술관'으로 넘어갔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을 지낸 정준모(62) 미술평론가는 "이중섭미술관이 이중섭의 명성에만 기댄 채 너무 부실하다"고 지적했다. 미술관을 통해 도시 재생에 성공한 스페인 빌바오, 영국 마게이트 등을 예로 들며 "지속가능성을 위해 제주의 관광 투자는 박물관·미술관 등을 묶는 문화관광 콘텐츠 확보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다. "이중섭이 살아야 제주와 서귀포가 산다" "이중섭미술관을 중심으로 도심을 재생하자"고 말하자 관객석에서 박수가 터져나오기도 했다. 정씨는 이중섭이 다닌 '오산학교' 미술반 후배다. 이날 참석자 중엔 오산학교 미술반 출신 차대덕 화가도 있었다.

제주 이중섭미술관 앞에 모인 이중섭 관계자들. 왼쪽부터 윤진섭·김홍희·민정기 이중섭미술상 운영위원, 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큐레이터, 이중섭 조카손녀 이지연·지향씨, 강경구 운영위원.

이중섭미술관 1년 예산은 8억원 수준. 고가의 소장품 확보가 어렵고 전시장 연면적도 590㎡ 규모로 협소하다. 그럼에도 지난해 전국 국·공립미술관 중 관람객 수 6위를 기록했다. 정씨는 "이중섭이 지닌 브랜드 가치는 단연 뛰어나다"며 "기탁·임차 등의 방법으로 고가의 작품 확보 방안을 연구하고 국제적인 문인·화가·무용가 등을 초치해 이중섭이나 제주 관련 작품을 제작하도록 해 전략적 가치를 높여야 한다"고 했다. 미술관도 변신을 꾀하고 있다. 지난 5월부터 토론회 및 만족도 조사를 실시했다. 건물 외벽을 말끔히 도색하고 8월엔 미술관 옆 부지(688㎡)를 약 16억원에 매입해 시설 확충 계획 용역을 맡긴 상태다. 개관 20주년인 2022년에 맞춰 시설·소장품을 확충해 제2의 개관을 선보인다는 방침이다.

이날 행사엔 양윤경 서귀포시장, 오광협 전(前) 서귀포시장, 강명언 서귀포문화원장, 김병수 전 서귀포문화원장, 고순향 서귀포시 문화관광체육국장, 현을생 제주국제관악제 조직위원장, 홍명표 한국관광협회중앙회 상임고문, 민정기·강경구·김홍희·윤진섭 이중섭미술상 운영위원, 박명자 갤러리현대 회장, 현영모 소암기념관 명예관장, 고영우 기당미술관 명예관장, 안규식 김창열미술관장, 이왈종 이중섭미술관 운영위원장, 손명철·이명복·이석창·진성희·홍진숙 이중섭미술관 운영위원, 이중섭 조카손녀 이지연·지향씨, 김문순 조선일보 미디어연구소 이사장 등 각계 인사와 제주도민 100여 명이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