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6세대(50대·80년대 학번·1960년대 출생인 이들을 가리키는 말)라고 다 같은 586이 아닙니다. 1987년에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느냐가 제일 중요해요."
더불어민주당 계열에서 10년 넘게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한 김모(50)씨는 "88·89학번을 586세대로 싸잡아 비난하면 서운하다"며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에 대학에 간 586들은 선배들에게 눌려서 나처럼 공천 한 번 못 받고 주저앉은 사람이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지방의 한 국립대 89학번 출신인 김씨는 30대 초반에 의원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2~3년 선배들이 공천을 받고 금배지를 다는 것을 보며 곧 자신의 차례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김씨와 비슷한 시기나 좀 더 일찍 정치에 발을 들인 동년배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흔히 '586 끝물'로 불리는 88·89학번은 정치권에서 '불우학번'으로 불린다. 이 학번들이 민주화 이후에 대학에 들어오는 바람에 업적을 남긴 선배 세대에 눌려 50대가 되도록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걸 가리키는 말이다. 이 '불우학번' 보좌진들 사이에선 '88학번부터는 잘 풀리면 구청장, 잘 안 풀리면 보좌관'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도 돈다.
최근 조국(54) 법무부 장관에 대한 인사 검증 과정에서 촉발된 '586세대 장기패권론(論)'이 화제다. 1980년대 민주화 투쟁에 앞장섰던 586세대들이, 민주화 이후엔 빠르게 기득권에 진입해 다른 세대를 착취한다는 것이다. 조 장관은 34세 때 울산대 법대 교수가 된 뒤 동국대를 거쳐 36세 때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자리 잡았고, 이후 우리 사회의 대표적 진보 인사 중 하나로 명성을 누렸다. 그리고 이번 법무부 장관 검증 과정에서 서울대 교수란 지위와 각종 인맥·지연·학연을 자녀의 입시 등에 적극 활용했다는 의혹과 혐의를 받고 있다. 이를 계기로 사회 주류 586세대들이 누리는 기득권의 실체에 대한 비판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하지만 586세대라고 모두 기득권이라 싸잡아 비난하는 것은 억울하단 반론도 만만찮다. 586세대 중에서도 주류와 비주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586세대 주류는 이미 30대 초반에 사회 주류에 진입해 20년 가까이 주도권을 잡았다. 하지만 비주류 586세대는 보좌관 김씨와 다를 바 없는 처지인 사람도 많다. 그렇다면 586세대의 주류와 비주류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아무튼, 주말'이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128명의 출생연도, 학력 및 학번 등 스펙을 분석해봤다. 민주당을 분석 대상으로 삼은 건 표본 집단이 가능한 규모의 원내 제1당일 뿐만 아니라 586세대가 확고한 당내 주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서울 대학' 졸업한 87학번 이전 운동권이 진짜 586?
1987년, 대학교 졸업자, 인서울(서울지역 소재 대학을 가리키는 은어). 이 세 가지 키워드가 뚜렷한 공통점이었다. 128명 의원 중 586세대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은 총 68명. 이들 모두 대졸자였고, 66명이 87학번 이상이었다. 그리고 인서울 대학 졸업자는 57명이었고 그중 서울대 15명, 연·고대는 각각 10명이었다. 학번 분포에서 두드러진 특징은 1987년이 하나의 분기점을 이룬다는 점. 민주당 의원 중 80~87학번은 학번별로 적게는 4명 많게는 15명이 포진해 있었다. 하지만 88·89학번은 각각 1명뿐이었다. 여야를 넘나들며 수년간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일했던 이동기(43)씨는 "87학번을 기점으로 586세대 운동권의 운명이 갈렸다는 건 여의도 정계에선 정설"이라며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부터 시작해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까지 이어지는 거대한 사건에 동참했느냐 여부가 그 이후의 삶을 결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1987년이 중요한 건 여당 586그룹 주류 대부분이 운동권 출신이기 때문이다. 민주당 586 의원 중 금태섭(52), 조응천(57) 의원 등 검사 출신 의원이 일부 있었지만, 절대다수는 학생운동 경력을 발판 삼아 정치에 뛰어든 운동권 출신이었다. 이들의 입신(立身) 경로나 시기는 대개 비슷하다. 민주화 이후 시민사회 활동이나 국회 보좌관 등을 통해 정계에 입문해 2000년대를 전후해 공천을 받아 의원이 되는 식이었다. 이런 출세 과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민주당 정책위의장을 하고 있는 조정식(56) 의원이다. 연세대 82학번인 조 의원은 졸업 후 노동운동을 하다가 1990년 민주당에 합류한 뒤 보좌관 등을 거쳐 2004년 경기도 시흥에서 당시 열린우리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뒤 내리 4선을 했다. 같은 82학번인 안민석(53) 의원도 서울대 총학생회 간부 출신 운동권으로 2004년 경기도 오산에서 열린우리당으로 출마해 당선된 뒤 같은 지역에서 4선을 했다. 조 의원과 안 의원, 그리고 조국 장관은 나이는 다르지만 모두 같은 82학번으로 비슷한 시기 학생운동에 투신해 1987년 당시 자연스럽게 주축 세대로 자리 잡았다. 세 사람 모두 그 경력을 바탕으로 30대를 전후해 진보 진영의 주류에 쉽게 진입할 수 있었고 승승장구했다. 민주당 소속 의원들의 학번 분포를 보면 81학번부터 84학번까지 유난히 숫자가 많다. 이 학번들이 1987년 당시 학생운동권의 지도부였다.
주류는 의원, 비주류는 구청장?
구청장, 즉 기초지방자치단체장급(級)으로 가면 어떨까. 민주당 소속 기초지자체장 154명을 놓고 보면 국회의원과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여기선 '80~87학번·대졸자·인서울', 즉 주류 586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은 20명 정도로 소수였다. 구청장이나 군수 등 기초지자체장 대부분이 1940~50년대생이나 70년대생인 비(非)586세대였고, 586세대라도 '불우학번'이거나 지방대 또는 중졸·고졸 출신인 경우도 여럿 있었다. 국회의원과 뚜렷하게 구분되는 지점이다.
정치권에서 '불우학번'의 사례로 종종 꼽히는 것이 오승록(50) 서울 노원구청장이다. 오 구청장은 연세대 88학번으로 부총학생회장을 맡아 학생운동을 하다 옥고를 치른 '레전드 운동권' 중 하나다. 그는 이후 국회의원 비서관과 청와대 행정관 등을 지냈지만 처음으로 선출직 공천을 받은 건 2010년 지방선거 때 서울시의회 의원 자리였다. 이후 2014년 서울시의원에 재선되고, 2018년 지방선거에서 처음으로 구청장 공천을 받아 당선됐다. 같은 대학 81학번 선배로 총학생회장 출신인 우상호(57) 의원은 2004년 열린우리당 공천으로 국회에 입성한 뒤 내리 3선을 하며 민주당 원내대표까지 지낸 실세다.
586세대의 장기 패권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가 이런 끈끈한 네트워크 덕분이란 지적도 많다. 586세대의 수퍼스타 중 하나였던 임종석(53)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민주당 홍익표(52) 의원 간의 관계가 대표적 사례다. 19대 총선 당시 임 전 실장이 정치자금법 위반 문제로 의원 출마가 힘들어지자 대학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던 홍 의원에게 자신의 지역구(성동을)를 넘겼다.
서강대 사회학과 이철승 교수는 586세대의 장기 패권을 비판한 저서 '불평등세대'에서 "586세대는 자신들의 세대를 중심으로 '핵심 내부자 그룹'을 구성하여 선출직과 임명직을 독식하는 '세대 독점' 시스템을 이룩했다"며 "586세대가 1980년대에 젊음을 민주화에 바치는 희생을 통해 오늘의 자리에 올랐다면 이제는 후배세대들에게도 공정한 사회를 물려주기 위한 두 번째 희생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